
고려 충신 충재(忠齋) 최문한…龍馬의 꿈, 명문세족으로 이어지다
- 이홍섭 시인
■용마의 꿈, 고려의 부마
옛 속담에 “장수 나자 용마 난다”라는 말이 있다. 일이 잘 되려면 시운이 절로 맞아 떨어진다는 뜻이다. 용마(龍馬)란, 용의 머리에 말의 몸을 한 전설 속의 짐승을 이르는 말로, 훗날 매우 잘 달리는 뛰어난 말을 지칭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우리나라 전역에 퍼져있는 아기장수 설화는 이 속담이 비극으로 끝나는 모티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수 죽자 용마 죽는다”라는 것이 그 골격이다. 이 아기장수 설화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난한 평민 집안 출신이다. 아기장수가 타고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죽게 되면 용마도 따라서 죽게 되거나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이때 용마가 빠져 죽은 곳을 용소(龍沼) 또는 용지(龍池)라 부른다.
하지만 참으로 드물게도 평민 출신이 아니면서 이 아기장수 설화를 자신의 생애에 새겨 넣은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부마이자 강릉 최(崔)씨 문한계(文漢系)의 시조인 충재(忠齋) 최문한(崔文漢)이다. 고려의 멸망과 함께 좌절한 그의 꿈은 그의 용마와 함께 강릉시 포남동의 용지(강원도 기념물 제3호)에 서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한 최문한은 충숙왕의 딸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배필로 맞아 부마가 되었다. 왕의 사위, 즉 부마가 되었다는 것은 전도유망한 미래를 보장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의 관직은 병기를 제조하고 무기를 조달하던 관청의 종2품직인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이르렀다.
부마(駙馬)라는 말은 원래 한나라 때 황제의 수레를 끄는 말을 관리했던 부마도위(駙馬都尉)라는 벼슬 이름에서 유래했다. 왕이 타는 수레를 끄는 말을 관리한다는 것은 그만큼 왕이 믿을 수 있는 최측근이라는 뜻이다. 그를 둘러싼, 말과 관련된 각종 설화의 시작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출발하였는지도 모른다.
■성황신상을 부순 강직함, 대왕신으로 존숭
'강릉최씨세보'의 '고려충숙왕부마충재공행적'에 따르면, 최문한은 기상이 웅위(雄偉)할 뿐만 아니라 도량이 크고 일처리가 명쾌했다고 한다.
그가 영남의 안렴사로 갔을 때 일어난 한 사건은 그의 성품을 잘 보여주는 일화이다. 그는 한 마을을 지나면서, 이곳에 모셔진 성황신이 매우 흉악하여 말을 타고 사당을 지나가는 자가 말에서 내리지 않으면 말이나 사람을 죽게 한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최문한은 일부러 말에서 내리지 않고 사당 앞을 지나갔다. 십리 남짓을 더 갔을 때 소문대로 타고 있던 말이 갑자기 죽어버렸다. 그러자 최문한은 가던 길을 멈추고 사당으로 되돌아와 성황신상을 부수고 사당에 불을 놓아 태워버렸다. 그 뒤 마을 사람들은 그의 형상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 기록은 그의 강직한 성품을 잘 보여주면서 동시에 그가 성황신에 비견되는 '대왕신'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려준다. 민간에 널리 퍼졌던 대왕신앙은 왕을 경외해 신으로 모시는 행위를 비롯, 민간 전설 속에 남은 비운의 영웅들이나 영험한 산, 강, 숲 등을 모시는 신앙을 통틀어 말한다. 최문한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제를 받거나 무덤이 있는 강릉 북쪽 마명산의 이름을 따 마명산신 혹은 대왕이라 불리게 된 것은, 그가 민간에서 이러한 대왕신으로 존숭받았음을 알게 해준다.
역사 속에 실존했던 인물이 아기장수 설화와 대왕신 설화를 동시에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그만큼 생전에 그가 펼쳐간 삶이 드라마틱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왕조의 몰락과 충절
최문한이 살았던 고려 말은 혼돈과 격변의 시대였다. 밖으로는 원·명나라의 압력,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편한 날이 없었고, 안으로는 권문세가와 신흥사대부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다. 혼란의 와중에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마침내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세웠다.
주군을 잃은 고려 유신들은 망국의 한을 달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로 두문동(杜門洞,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은거했다. 최문한도 이때 은거한 72인의 유신 중 한명이었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후 그는 박해를 피해 선덕공주와 함께 강화로 옮겼다가 마침내 강릉으로 이주했다. 이때 선덕공주는 여덟 그루의 소나무를 수레에 싣고 강릉으로 왔다고 전한다. 가호(加號, 추가된 호)가 숭명공주(崇明公主)인 선덕공주는 효심과 충절이 뛰어나고 두루 덕을 갖췄다고 한다. 최문한을 시조로 하는 강릉 최씨의 한 계통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강릉의 대성 중 하나인 강릉 최씨는 본관을 같이하면서도 계통이 다른 세 개의 파가 있다. 고려 때 경흥부원군(慶興府院君)에 봉해진 충무공(忠武公) 최필달(崔必達)을 시조로 하는 계통, 고려 태조의 부마로 대경(大卿)에 올랐던 최흔봉(崔欣奉)을 시조로 하는 계통, 그리고 바로 최문한(崔文漢)을 시조로 하는 계통이 바로 그것이다. 이들 세 계통은 계통의 뿌리와 호, 또는 번창했던 후손들의 지위를 근거로 하여 각각 경주계, 전주계, 강화계, 또는 충무공파, 평장공파, 동원군파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용마의 좌절과 용지(龍池) 설화
최문한은 강릉으로 옮겨온 후에도 개경을 왕래하면서 고려의 부흥을 꿈꾸었다. 그는 개경을 왕래할 때 항상 애마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날 개경에서 돌아와 못가에서 말을 씻겨 주고 있을 때 갑자기 못 속에서 안개가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그러자 애마가 크게 울면서 안개가 솟아오르는 못 가운데로 뛰어들어 용으로 변하면서 운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를 본 최문한은 자신이 꿈 꾼 고려의 부흥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되었다. 용마와 함께 그의 꿈도 운무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후 이 연못은 용지라 불리게 되었다.
용지는 당시만 해도 둘레가 수백 보에 이르는 큰 연못이었으나 훗날 주민들이 연못을 메우고 논을 일궜다. 1754년(영조 30년) 강릉부사 이현중이 다시 못을 팠고, 1920년 후손들이 유적비와 기념각을 세우고 용지각(龍池閣)이라고 칭하였다. 1956년, 후손들이 다시 중수하고 석축을 쌓아 현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2010년에는 태풍 루사 등으로 인한 피해를 보수하기 위해 강릉시에서 중수공사를 했다.
최문한의 최후도 말(馬)과 관련된 설화로 전해져 온다. 최문한은 강릉지역으로 외적이 쳐들어오자 말을 타고 싸움터로 나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이때 타고 간 말이 유품을 챙겨 돌아와 최문한의 집 앞에서 울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늘 타고 다니던 말의 울음소리를 듣고 뛰쳐나왔다. 가족들은 이 말의 안내로 다시 전쟁터에 가서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집 뒷산에 묻었다. 이후 이 뒷산은 말이 주인의 유품을 싣고 와서 울었다 하여 마명산(馬鳴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최문한의 묘는 마명산 북쪽 줄기에 있다.
말은 주인을 배반하지 않는 충직한 동물이다. 그의 생애 전반에 말이 등장하는 것은, 후손들이 고려 부흥을 열망했던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강릉에는 말을 앞세워 그의 이러한 충절을 기리는 지명이 여럿 남아있다. 용지, 마명산 외에 임당동 중심지역을 가리키는 '말루'라는 지명도 여기에 해당한다. 말루는 최문한이 타고 다니던 말을 매어 두던 누대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구체적인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 역사와, 후대의 상상과 전설이 가미된 설화는 늘 밀고 당기기를 하게 마련이다. 이 싸움은 궁극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도 설화도 다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가 이병주는 작품 '산하'의 마지막 장에서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라고 썼다. 인간은 태양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고, 월광만으로 사는 것도 아니다.
역사와 설화, 태양과 월광 얘기를 하는 것은, 옛 선인들의 일대기를 논할 때 늘 이 두 개의 문제가 서로 충돌하기 때문이다. 고려말과 조선 초를 살다간 최문한의 일생을 논구하는 데도 이 문제는 반드시 돌출될 수밖에 없다.
최문한의 행적은 '고려사', '고려사절요'같은 관찬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강릉최씨세보'와 '임영지' 등에 일부가 전한다. 조선 이전의 옛 기록물들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현실을 고려하면 이 정도의 역사와 설화가 전해지는 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역사와 설화가 가미된 인물의 행적을 기록할 때는 늘 펜 끝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최문한의 경우처럼 한 집안 세보의 맨 위를 차지하고 있는 시조인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이 글을 쓰면서, 후손들의 원망을 지레 감수하면서까지 지난 2010년 강릉최씨대종회에서 펴낸 '국역 충재전기(國譯 忠齋傳記)'에 실려 있는 최문한의 행적을 전면적으로 따르지 않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문한의 행적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이 책은, 1950년 대전에 거주하던 한 후손이 우연히 기록물 '의사열전(義士列傳)'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었다는 필사본을 번역한 것이다. 따라서 원본의 존재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단지 필사한 후손의 구술로만 원본의 존재가 전해지는 이 필사본은, 아직은 전문가들의 더 많은 검토와 태양에 바래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사마천'을 꿈꾸었던 소설가 이병주는 “역사는 산맥을 기록하고, 나의 문학은 골짜기를 기록한다”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역사와 설화, 그리고 이와 관련된 지명들만으로도 충재 최문한은 충분히 역사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이 되어 있다. 용마처럼 원대하고 충직했던 그의 꿈은 비록 당대에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명문세족으로 자리 잡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