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춘추칼럼]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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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

한파가 맹수처럼 한반도를 가로질러 가는 동안 대지 위의 웅덩이와 강은 죄다 얼고, 삭풍은 빈 나뭇가지를 붙들고 울어댄다. 나는 올해의 마지막 일몰을 보러 임진강변으로 나섰다. 저 아래 평지는 월동을 위해 몽골에서 날아온 독수리 도래지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강 이쪽은 평야, 강 너머는 북녘 마을이다. 북녘에서 흘러온 물은 평야와 북쪽 마을 사이를 돌아 서해 쪽으로 무심히 흘러간다.

우리는 시간을 달려서 동지도 지나고 한 해의 끝에 닿는다. 지금은 고요 속에 머물며 한 해를 돌아볼 때다. 우리는 다른 처지에서 하루를 맞고 떠나보내는데, 어느 하루도 똑같지 않다. 그 다른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나? 살아보니 인생의 목적을 돈이나 명예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뜬구름 같이 흘러간다. 인생의 여정은 의미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누가 가장 불행할까? 병을 앓는 사람도, 직장을 잃은 사람도,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도 아니다. 삶의 경이를 찾지 못한 채 무미하게 하루를 사는 이들이 불행하다. 줄 없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같이, 과녁을 겨냥해 화살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같이 사는 이들은 공허하고 불행하다.

당신의 올해는 어땠는가? 나는 성실한 세탁부처럼 하루하루를 보내고 최선을 다했다. 다만 기대만큼 소득은 없었다. 그래도 좋았던 것은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할 만한 과오 없이 한 해를 보낸 점이다. 동시대를 사는 우리는 시절 인연으로 맺어진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울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우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울고 있다. 지금 누군가 어디선가 웃고 있다면 그는 까닭 없이 웃는 게 아니다. 그는 나 때문에 웃고 있다. 당신은 나 때문에 울고, 나 때문에 웃는다. 더러는 서로의 지옥까지 내려가 서로를 물어뜯기도 할 것이다.

묵은해를 돌아보고 새해 소망도 몇 가지 적어본다. 새해에는 욕심을 줄이겠다. 책을 덜 읽고, 집안 구석구석에 쌓아둔 책들은 나누겠다. 돈벌이에 소비하는 시간을 줄이겠다. 멀리 떠나는 여행 대신에 벗들과 자주 만나서 많이 웃겠다. 산책 거리를 조금 더 늘리고, 식사는 하루 두 끼만 챙기겠다. 멀리 사는 벗에게는 편지를 쓰겠다.

새해에 어른은 더 어른답고, 아이는 아이답기를 바란다. 미아로 떠돈 이들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실직한 가장들은 새 직장을 구하기를. 학대받는 반려동물들은 착한 주인을 만나기를. 당신과 나는 세상의 사막과 황량한 풍경을 더 그리워하고, 우리보다 연약한 동물을 더 사랑하자. 살아보지 못한 미지의 시간과 걷지 않은 낯선 길을 더 갈망하고, 꿈이 깨지거나 계획한 일들이 틀어지는 것 따위를 무서워하지 말자.

새해에는 외부의 충고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더 귀를 기울이자. 굶주린 이들은 주린 배를 채우고, 집 없는 이들에겐 따뜻한 잠자리가 주어지기를 바란다. 전쟁으로 시름하는 이들에게 벼락같이 평화가 주어진다면 나는 면도를 하면서 콧노래를 부르리라. 하늘에 더 감사하고, 이웃에게 더 자주 미소를 보이리라. “더는 인생의 시중을 들지 않으련다. 그냥 생긴 대로 살련다.” 나는 결심한다. 늘 옆에 끼고 읽는 시인 아틸라 요제프가 노래한 대로 살겠다고. 망각된 약속들, 망가진 꿈과 기대들, 지루한 기다림들, 이것들은 묵은해와 함께 흘려보낸 뒤 새해에 처음 솟는 해를 벅찬 가슴으로 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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