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판자촌 할머니의 밥상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지난 겨울 춘천시 후평동 판자촌에서 만난 할머니의 점심 밥상. 동치미, 고추장아찌, 배추김치만 올려져 있을 뿐 생선이나 고기 반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진=김준겸 기자

차갑게 굳어버린 기장밥. 그 옆에는 동치미와 고추장아찌, 다 쉬어버린 배추김치가 올려져 있었다. 지난 겨울 춘천시 후평동의 판자촌에서 만난 할머니의 점심상이었다. 취재를 위해 느닷없이 대문을 두드린 기자를 ‘손주 녀석이 놀러 온 것 같다’며 반겨주신 덕분에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가 고기반찬 하나 없는 밥상을 보고 이내 마음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부실한 밥상은 ‘오늘만 대충 차려먹자’는 귀찮음이 아니었다. 겨우내 이어진 고물가 현상은 할머니의 밥상에 남들에게 흔한 고기나 생선 반찬 하나마저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비를 부담하고 치솟은 공과금까지 치르고 나면, 할머니에게 남은 한 달 치 생활비는 10만여원에 그쳤다. 이가 다 빠져버려 국이 없으면 식사가 불편한데, 국거리 값마저 올라 두 달 넘게 미역국만 끓여 먹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며칠 전 모 기관이 출입기자들을 위해 마련한 오찬 간담회에 참석했다. 조청에 찍어 먹는 식전 새싹삼을 시작으로 보쌈, 양념게장, 더덕구이, 훈제연어 등 20가지가 넘는 정갈한 반찬이 눈앞에 차려졌다. 상차림 가격은 1인당 2만 7,000원. 후평동 판자촌 할머니가 한 달을 버텨내는 생활비 전체의 5분의 1이 넘는 점심값이었다.

‘식사가 조촐하지는 않았는지요?’ 예의를 갖춘 기관 대표의 마무리 인사말을 끝으로 오찬 간담회를 마치고 편집국 사무실에 복귀하는 길. 문득 판자촌 할머니의 점심상이 떠올랐다. 평소 같았더라면 생각지도 못했을 반성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매달 초대되는 만찬 간담회. 하루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부담 없이 지출하는 술값과 자가용 기름값. 브랜드 의류를 고르거나 해외여행을 떠나는 가끔의 사치. 기자로서, 고정적인 월급을 받는 사회인으로서 별생각 없이 누렸던 일상에 감사함이 대입됐다.

판자촌 할머니의 부실한 밥상은 선택이 아니었다. 서서히 강제됐다. 배우자와 사별하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 장애를 가진 아들을 홀로 키우려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해가 지날 때마다 살림은 팍팍해져만 갔다. ‘나마저도 가버리면 우리 아들은 어떡해?’ 인터뷰 막바지에 털어놓은 할머니의 마지막 대답이었다. 부실한 밥상 따위에 아랑곳하지 않을 테니 아들의 안위만이라도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덤덤하되 처절한 고민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댁의 창고방에는 그 흔한 고기반찬 하나 없던 밥상과는 대조적으로 10㎏ 쌀 포대가 여러 개 쌓여 있었다. 지자체에서, 노인복지기관에서, 교회에서, 봉사단체에서 복지라는 명목하에 정작 할머니가 필요한 것을 고려하지 않은 채 연신 쌀만 가져다줬기 때문이다. 골목 구석구석의 민생부터 들여다보는 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다.

마침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한 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나라를 다스리는 일. 정치(政治)를 하고 싶다는 정당인들의 우렁찬 호소가 반복되는 요즘이다. 색깔론과 심판론에 잠식돼 정권 교체를 위한 씨름만을 추구하는 정치인은 지역사회를 지탱할 수 없다. 이가 없어 밥을 씹기 불편한 후평동 판자촌 할머니에게 쌀이 아닌 반찬과 국거리를 선물하는 복지. 사회적 약자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책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후보자가 국민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 & 피플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