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박종홍칼럼]첫발 뗀 영수회담, 상생·화해의 정치 디딤돌

의대 증원 공감대 형성

과거 미국은 이승만 정권 시절부터 일본과 외교관계를 다시 재개하라는 압력을 한국에 가했다. 이에 1963년 출범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정부는 실패를 거듭해 왔던 한일협정 타결에 역점을 두고 일본과의 협상을 적극 추진했다. 그러나 일본의 사죄 없이 한일 외교를 재개하려는 것은 굴욕 외교라는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곳곳에서 학생 시위대와 경찰, 군인 사이에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각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제3공화국은 한일 외교를 밀고 나갔다. 결국 대한민국과 일본 양국은 1965년 12월18일 오전 10시30분 중앙청 제1회의실에서 두 나라의 국교 정상화를 최종적으로 매듭짓는 기본조약 및 협정에 의한 비준서를 교환했다. 주목되는 점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지 60년 만에 이뤄진 비준서 교환을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헌정사상 최초의 영수회담을 가졌다는 점이다. 1965년 7월20일 박 대통령은 박순천 민중당 대표최고위원을 만나 임시국회를 소집해 한일협정 비준안과 베트남전쟁 파병 동의안을 다루기로 합의했다. 이후에도 박 대통령은 1970년 유진산 신민당 총재를 두 차례 만나는 등 재임기간 총 5회에 걸쳐 영수회담을 가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2년 만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영수회담을 가졌다. 한국 정치에서 ‘영수회담’이란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 회담을 의미한다.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의 양자 회동은 정국 현안의 중요 변곡점이 될 수 있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영수회담이 꽉 막힌 협치의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 국민적인 관심이 쏠렸지만 첫 만남부터 기대했던 구체적인 성과는 나오지 않았다. 양측은 의대 증원 필요성과 자주 만남을 갖는 것 등에 공감대를 이뤘지만 민생 회복 지원금 25만원 지원과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 특검법 등 대부분 현안에서는 시각차만 확인했다. 양측은 합의문도 따로 만들지 않았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빈손으로 끝났다’고 평가했다. 결과물이 없어 더 네탓 공방이 가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지울 수 없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이 대표가 앞으로도 소통하기로 하면서 ‘협치’의 불씨를 살려놨다는 점은 의미가 있다.

1987년 6월24일 이뤄진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간 영수회담은 민주화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당시 김 총재는 회담 자리에서 4·13 호헌조치의 철폐와 김대중 민주화추진협의회장의 사면복권, 6·10 민주항쟁 관련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했지만 전 대통령은 미온적이었다. 김 총재는 즉각 ‘영수회담의 결렬’ 발표와 함께 강경 투쟁을 선언했다. 결국 5일 뒤 당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 노태우 대표위원이 6·29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에서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현 국민의힘) 총재와 7차례나 만났다. 대표적인 성과는 2000년 영수회담을 통해 임시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약사법을 개정한다는 합의를 이뤄냈다. 정부가 추진해 온 의약분업 정책을 유지하되, 국회에서 의료계 유화책을 추가로 담은 약사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것으로 정부·여당과 야권, 의료계 사이 대치가 완화됐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미국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을 ‘팔이 긴 원숭이’라며 모욕적 비난을 했던 스탠턴을 국방부 장관에, 경선 라이벌이던 슈어드는 국무장관에, 야당(민주당) 출신인 기디언 웰스는 해군장관에 각각 임명했다. 링컨은 “유능한 인재들이 나라에 공헌할 수 있는 기회를 내가 빼앗을 권리는 없다”고 말했다(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 中).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태어난 ‘시골뜨기’ 링컨이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이 된 데에는 포용의 정신이 큰 힘이 됐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는 격렬하게 인종차별 저항운동을 하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26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런데 그는 1994년 남아공 대통령에 당선되자 백인을 원망하지 않고 끌어안았다. 전임 백인 대통령들을 단죄하는 보복의 정치를 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가족, 지지자들을 핍박했던 세력과 함께 일하는 협치를 했다. 상생과 화해의 정치다. 만델라는 “용기 있는 사람은 용서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통합의 길을 걸었다. 두 지도자가 앞으로 자주 만나 상대를 나락으로 떨어뜨리기 위한 정치를 끝내고 국민과 국가를 위한 대한민국 정치의 새 장을 열어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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