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신호등]“계산 없이 사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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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교육부 김민희 기자

2004년에 개봉한 영화 ‘IF ONLY’에서 주인공 이안은 눈앞에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만다. 그녀가 죽고 나서야 잘해주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녀의 마지막을 보러 가기 전 탑승한 택시에서 기사가 자신에게 건넨 말을 떠올린다. “(그녀를) 가진 것에 감사하세요. 계산 없이 사랑하고.”

영화가 개봉된 지 20년이 흘렀지만 택시 기사의 말이 아직도 가슴에 박힌다. 가진 것보다 가지지 못한 상황을 탓하는 마음이 만연해서일까. 지난 2월 초, 우리가 가진 것조차 가져본 적 없는 이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은 당연하다고 생각됐던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들어줬다. 자유롭게 손과 발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 무언가를 듣고 눈에 담을 수 있다는 것. 너무 당연해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을 잃었다는 생각을 방증했다.

장애인 유권자 기획 기사를 준비하던 중,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오는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난 10월에 ‘이해하기 쉬운 선거 공보 가이드 북’을 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의 참정권을 보장하겠다는 중앙선관위의 노력이 돋보였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지난 1일 본보가 도내 경선을 완료했거나 앞둔 출마자 선거사무소에 확인해 본 결과, 23곳 중 단 3곳 만이 해당 선거 공보 가이드를 접한 것으로 확인됐다. 턱없이 적은 숫자에 장애인 유권자가 걸어온, 걸어가야 할 길이 보였다면 그것은 단지 착각일까. 점자 명함 등 장애인 유권자를 고려한 선거 공보물 역시 지난 1일 기준 23명 가운데 고작 5명에 불과했다. 일부는 국회의원이 되면 하겠다는 식으로 대답하며 답변을 미뤘다. 장애인 유권자는 예상이라도 한 듯 ‘그러면 그렇지’라는 반응이었다.

도 내 연령별 등록 장애인 현황(2023년 12월 기준)에 따르면 선거 가능 연령대에 속한 장애인 수는 모두 9만 8,154명에 이른다. 가장 최근에 시행된 제20대 대통령선거 당시 강원도 선거인 수 153만 8,846명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장애인 유권자는 전체 6%다. 적지 않은 숫자지만 그들은 국민의 권리인 참정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점자를 모르면 점자 공보물도 점자 명함도 읽을 수 없고, 한글로 쓰였다고 해도 어린 나이에 소리를 잃은 사람은 한국어가 제2의 언어처럼 느껴진다. 가파른 언덕길로 인해 휠체어를 끌지 못해 투표를 고사하는 사람이 있고, 투표 전 서명을 하거나 지문을 인식해야 하는 단계도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상황에 낙담하거나 좌절하기를 거부했다. 차별받는 삶이라 할지라도 지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행복을 찾았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장애인 유권자를 만났을 때, 그들은 어렵거나 힘든 것을 이야기하기보다 나라를 위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본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안은 사랑하는 그녀를 잃은 그날을 한 번 더 살게 되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살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결말 앞에서 이안은 결심한 듯,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법을 알려줘서 고마워, 또 사랑받는 법도…”.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삶,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계산 없이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그들의 삶에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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