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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처서비(處暑雨)

그리도 맹렬하게 기승을 부리던 더위가 한풀 꺾였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이 완연하다. 살갗에 와 닿는 청량한 바람이 심장까지 식혀주는 느낌이다. 돌아보면 지긋지긋했던 불볕더위였다. 염천에 열대야, 밤낮없이 무더위에 시달렸다. 여기에 새벽녘까지 이어진 런던 올림픽 열기가 더해져 그야말로 녹초가 되기 일쑤였다. 릴케의 시구대로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다.

▼ 절기 처서(處暑)가 하루 앞(23일)이다. 더위가 그친다는 뜻의 명칭이다. 옛 사람들은 처서에 대해 '땅에서는 귀뚜라미 등에 업혀오고, 하늘에서는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했다. 박성룡의 시 '처서기(處暑記)'에 더위를 물린 개운함이 물씬하다. “처서 가까운 이 깊은 밤/ 천지를 울리던 우렛소리들도 이젠/ 마치 우리들의 이마에 땀방울이 걷히듯/ 먼 산맥의 등성이를 넘어가나 보다.// (…)//세상이 유리잔같이 맑은/ 그 가을의 아침에 비로소/ 나는 잠이 들겠다.”

▼ '처서지절(處暑之節)'을 '잔서지절(殘暑之節)'이라 했다. 늦더위가 남아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농가월령가 7월령에서는 '늦더위 있다 한들 절서(節序)야 속일쏘냐'라며 이미 기세가 꺾인 염(炎)장군을 비하했다. 하여 들판의 곡식과 과일이 가을 햇볕을 쬐며 한창 여무는 때다. 그렇기에 비(雨)는 당연히 금물이다. 그것이 기어코 내리니 이를 '처서비(處暑雨)'라 한다.

▼ 예부터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준다'는 속설이 있다. 결실을 이뤄야 할 때 비가 와 흉작이 되니 각별히 대비하라는 말이다. 늦더위가 여전한데 야속하게도 처서 날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다. 봄부터 계속된 가뭄, 여름철 폭염에 '처서비'까지 오다니 도대체 뭘 잘못했단 말인가. 이 와중에 수입 곡물가격도 폭등해 '먹거리 대란'이 우려된다는 소식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 했다. 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연말 대선 결과의 화(禍)가 두렵지 않은가.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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