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중언

[언중언]폭설

“…// 눈더미의 무게로 소나무 가지들이 부러질 듯/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 최승호 시인의 첫 시집(1983년) 표제작 '대설주의보'다. 교사로 근무했던 정선 사북에서 목격한 풍경이다. “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오듯 덤벼드는 눈”이라는 서정적 묘사도 있지만 “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 “백색의 계엄령”에서 암울했던 당시의 우리 사회 상황을 읽는다.

▼'한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제갈태일 저, 더불어책 간)' 44쪽에 있는 일화다. “일제 치하인 1917년경 강원도 산골 화전민들이 살던 오지에 폭설이 내려 그 이듬해 봄까지 교통이 두절되어 많은 사람이 참변을 당했다. 당시 조선총독부의 실태조사 보고서에서 감동적인 장면을 만나게 된다. 어느 외딴집 네댓 명의 가족이 고스란히 아사했는데 그 집 천장에 매달린 종이봉지에는 하얀 쌀이 두어 되가량 남아 있었다. 부모님 제사에 젯메 지을 쌀이었다. 부모님 제사에 쓸 쌀을 먹을 수 없어 굶어 죽은 것이다.”

▼폭설로 인해 목숨을 잃은 홍천 박정열 여사의 사연도 먹먹하게 한다. 1978년 3월12일, 제주도에 살던 박 씨가 6살 딸과 함께 홍천군 내면에 있는 친정으로 가던 길이었다. 고향 마을을 지척에 둔 고개(불발령)에 이르렀을 때 폭설을 만났다. 이미 날은 저물었고 눈이 1m 이상 쌓여 길을 잃고 헤매게 됐다. 그 와중에 눈보라가 쳐 기진해진 상태로 고립됐다. 기온이 떨어져 극심한 추위가 엄습해오자 자신의 옷을 벗어 어린 딸에게 입히고 품속에 껴안은 채로 숨을 거뒀다. 자식을 살려낸 애틋한 모정은 추모비로 남았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작품 '설국(雪國)'의 첫 문장이다. 연초이니 그런 경우다. 100년 만에 큰 눈이 왔다. 폭설(暴雪)이다. 하지만 스키장은 환호성이다. 눈의 경제학이다. '겨울에 눈이 많으면 풍년이 든다'는 속설이다. 길조일 테다.

용호선논설위원·yonghs@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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