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가 우리에게 가까워진 것은 아마도 1980년대 초 바웬사의 자유노조운동(솔리데리티)이 시작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당시 소련은 물론 동유럽이 공산당 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사회주의 나라에서 대규모 노조운동이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공산당이 노조에 무릎을 꿇고 자유주의 나라에서 하는 국민선거를 할 수 있었는가 하는 의문으로 세계인의 시선이 집중 됐다.
물론 바웬사는 폴란드의 대통령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오늘날 폴란드 정치 경제의 중심은 물론 바르샤바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중세 최전성기 폴란드 왕국의 500년 역사를 간직한 남부지방의 크라쿠프(Krakow)를 지나칠 수가 없다.
수도 바르샤바를 떠난 기차는 세 시간이 채 못 되어 남부 폴란드의 고도 크라쿠프에 도착했다.
15년 전 차량 편으로 모스크바를 떠나 남부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보고 체코로 내려가면서 부근의 크라쿠프를 지나쳐 버려 늘 아쉬워했던 터라 이번 여름 동유럽 여행에서는 영순위에 올라 있었다.
크라쿠프 역에 내려서는 기인을 만났다.
술 냄새가 물씬 풍기는 올백 머리의 잘 생긴 초로의 신사가 다가와서 자기 집은 140년 된 고풍스러운 집이라고 자랑하여 호기심에 따라간 민박집은 고색창연한 허름한 4층 아파트였다.
세간이라고는 흑백 TV 하나에 40년 되었다는 트랜지스터라디오 한 대, 젊었을 적 부부사진과 자녀들 사진이 놓인 장롱 두서너 개, 부부 침대방 하나와 맨바닥에 매트리스만 깔린 손님용 방 하나가 전부였다.
천장이 높은 낡은 아파트는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아 검게 그을리고 페인트들이 벗겨져 있었다.
너무도 허름하여 호텔로 갈까 망설이다 백성들 사는 얘기도 들을 겸 묵기로 하였다.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그는 젊었을 때 캐나다에 가서 8년간 택시기사로 일하다 돌아왔는데 쥐꼬리만 한 연금에 형편이 어려워 돈 떨어지면 부인 명령으로 역에 나가서 민박 손님을 구해 온다고 어깨를 움칫했다.
한때 잘나갔다는 그는 옛날 앨범을 내 보이면서 젊어서는 여자들이 줄줄이 따라다녔다고 자랑한다.
캐나다에서 아일랜드 청년과 동거한다는 큰딸을 그리워하면서 이웃에 아픈 둘째딸을 돌봐야 하는 부인은 이틀분 숙박비를 재촉했다.
부인은 컬렁컬렁 깊은 기침을 쉴 새 없이 하면서도 줄담배를 놓지 않고 있었다.
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한다.
공산당이 무너지고 민주화된지 20년이 가깝지만 폴란드의 민생은 아직도 고단하기만 한 것 같다.
크라쿠프에는 폴란드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들이 있다.
1039년부터 1596년 바르샤바로 천도할 때까지 폴란드 왕국의 수도였으며 이 왕국의 자취는 바벨언덕의 성 안에 있는 왕궁과 성당에 잘 남아 있다.
14세기에 세워진 바벨 성당에서는 역대 왕들의 대관식이 있었으며 왕가의 무덤들이 있는데 금박의 둥근 돔 종루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큰 11톤의 벨이 있다.
10세기 후반 독일 기사단의 압력을 피해 966년 로마 교황청과 결속하여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폴란드는 1000년에 포즈넌 대 주교구가 형성되면서 폴란드 왕국이 시작되었다.
11세기 크라쿠프로 천도한 이래 몽골의 침입과 독일, 키예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여 14기까지 봉건 분열시대를 면치 못했으나 1334년 즉위한 카시미르 대왕 때 국운이 번성하여 크라쿠프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바벨성당에는 카시미르 왕의 무덤이 있다.
전통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는 요한 바오로 2세(1920∼2005년)를 배출하였다.
크라쿠프는 그를 길러낸 곳이다.
시 희곡 등을 쓰며 연극 활동을 하던 그는 성직에 뜻을 두고 나치 치하에서 비밀리에 운영되던 크라쿠프 신학교를 졸업(1942)하여 사제가 되고(1946) 대주교로(1964) 봉사하였으며 비이탈리아권 국가에서 455년 만에 교황(1978)이된 곳이다.
그는 교황으로 27년간 봉직하면서 1994년 ‘3,000년을 맞는 칙서’를 통하여 구·신교의 일치운동에 화해적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폴란드 국민의 그에 대한 애정은 크라쿠프 근교에 있는 소금광산 300m 지하의 요한 바오로 2세 기념관에서도 잘 읽을 수 있었다.
폴란드는 미국 러시아에 이어 유태인이 많이 살던 나라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300만 유태인이 폴란드에서 학살되었다.
크라쿠프에도 그 흔적이 크게 남아있다.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는 크라쿠프의 유태인 이야기다.
전쟁통에 수용소로 끌려온 유태인들은 심한 노동과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나치당원 오스카 쉰들러는 나치 간부들과 결탁, 그릇공장을 세워 이들 무임의 유태인 노동력을 이용 돈을 버는 사업가이다.
노동가치가 없는 유태인은 짐짝처럼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한다.
이를 목격한 쉰들러는 인간적 고뇌 끝에 이들 유태인을 살리기로 마음먹고 나치 친위대 장교 괴트와 협상, 돈을 지불하고 자기고향 체코로 데려갈 1,100명의 명단을 작성한다.
체코행 기차에 탑승한 유태인들은 탈출에 성공하고 쉰들러의 체코 공장에서 종전을 맞는다.
전후 그들은 전범으로 몰릴 쉰들러를 염려해 금니를 뽑아 만든 반지에 ‘한 생명을 구한 자는 전 세계를 구한다’는 탈무드의 글귀를 새겨 모두의 서명이 된 진정서와 함께 쉰들러에게 전한다.
쉰들러는 더 많은 유태인을 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린다.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를 찍으면서 가장 아름다운 뒤뜰이 있는 집으로 묘사한 요제파 거리 12번지는 카페로 변신하여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수도 바르샤바에서 본 유태인 게토에서나 크라쿠프에서 본 유태인 구역에서나 유태인들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고 적막감마저 감돌았지만 넓게 조성된 유태인 묘지에는 말 없는 영령들이 수난의 역사를 웅변해주고 있었다.
최영하 본사 독자권익위원장 ·전 우즈벡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