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그림속 강원도]폭포의 정서 ‘오랜 기다림’과 ‘풍경의 감정’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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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이수억 '천당폭포'

◇설악 천불동 천당폭포, 캔버스에 유채,162.2x130.3㎝, 1967년.

폭포는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다리는 것이다. 설악산 천불동 골짜기 깊숙이 자리한 천당폭포는 이수억(1918~1990년) 화백이 남긴 ‘설악 천불동 천당폭포’(1967년) 속에서 그 기다림의 본질을 품고 있다. 천당폭포는 단순한 풍경이 아닌, 시간의 침묵을 품은 감각적 응답처럼 캔버스 위에 내려앉았다. 누구나 바라볼 수 있지만, 아무나 닿을 수 없는 깊은 산중의 고요다. 찰나의 포착이 아닌 오랜 기다림의 정서를 느끼는 것이 이 작품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려 130여 차례 설악산을 오르내린 이 화백은 단순한 관찰자를 넘어 자연 속 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붓은 장엄한 대자연을 재현하려 들지 않았다. 설악을 바라본다고 믿었던 그 순간, 설악의 눈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이 그림이 전하는 역설의 감각이지 않을까 싶다. 화면 정중앙을 가르며 떨어지는 하얀 물기둥은 수직의 긴장감을 부여하고, 이를 둘러싼 암반과 수목은 조용한 수평의 결을 형성한다. 초록과 회색, 갈색과 백색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채색은 수묵채색화의 한국적 정서를 서양화의 틀 속에서 소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천불동은 원래 ‘천 개의 부처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불교적 상징이 깃든 이 지형에 이 화백은 침묵의 정신성을 덧입힌다. 자연의 윤곽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채색 또한 과감하게 비워진다. 윤곽선 대신 명암과 색의 겹침으로 경계를 흐리며, 실제 풍경이 아닌 풍경의 감정을 그려낸다. 이 폭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을 향해 응답한 것처럼 느껴진다.

이 화백은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나 전쟁과 이념, 분단의 시대를 몸소 겪으며 화가로서의 길을 걸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도쿄의 동경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수학했고, 광복 이후 북조선미술동맹 함경남도위원회 서기장으로 활동하다 6·25전쟁 발발 후 남하했다. 전쟁의 참상을 담은 종군화가로서의 경험은 그의 초기작에 짙은 리얼리즘을 남겼고, 이후 춘천에 정착해 강원도의 자연과 사람을 화폭에 담으며 한국적 산수화의 새 흐름을 열었다. 춘천에 정착한 그는 강원도미술협회와 춘천미술협회의 초대 회장을 맡아 지역미술의 기반을 다졌고, 설악산을 주제로 한 작품들로 1962년 강원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예술은 삶과의 동행이었다. 그는 늘 자연 속에 있었고, 그 자연은 항상 그를 감싸 안았다. 유년의 기억, 분단의 상처, 전쟁의 기억, 그리고 강원도의 산수는 그의 붓끝에서 한데 엉켜 ‘고요 속 외침’으로 피어났다. 이 화백이 남긴 풍경 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보는 동시에 그 자연을 마주한 한 사람의 존재론적 사유를 엿본다. 그림은 한 화가의 눈이 오래도록 바라본 풍경이지만, 그 시선이 작품으로 우리 마음 안에 남을 때 그것은 ‘우리의 기억’이 되고 ‘잊지 말아야 할 풍경’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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