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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79주년 특별 기획-광부 엄마]검은 보석 찾는 여인들…지상 막장 지키는 마지막 영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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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성광업소 선탄부 5인

◇15일 태백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 휴게실 앞에서 태백의 마지막 여성 광부인 선탄부들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강도 높은 노동에 의존하는 탄광촌에는 여성의 일자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여성광부가 없는건 아니다. 지하막장에서 막 올라온 석탄 더미에서 상품성이 있는 석탄과 잡석 등을 가려내는 선탄부는 여성만의 전유물이었다. 이들이 일하는 공간은 지상막장이며 이들은 탄광의 유일한 여성노동자다. 신세희기자

4월15일 오전 9시 태백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 비가 추적추적 내리다 그치길 반복했다.

오랜 세월 바닥에 쌓인 탄가루는 비에 젖어 꾸덕꾸덕했다. 오가는 광부도, 차량도 거의 눈에 띄질 않았다. 꾸덕하게 뭉친 탄가루 위에는 사람 발자국도, 차량의 바퀴 자국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철암 선탄장은 태백 일원의 막장에서 채굴한 석탄이 모두 모이는 곳이다. 지하 깊은 곳에서 캔 석탄을 이곳으로 가져와 크기별로 분류하고 정탄과 버력(폐석)을 분리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운 석탄가루로 만든다.

어지럽게 얽히고 낡은 컨베이어 벨트가 굉음과 분진을 내뿜으며 석탄을 실어나르는 이곳을 광부들은 지상 막장이라고 부른다.

올 6월 말 장성광업소 폐광을 앞두고 철암 선탄장은 빠르게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석탄을 실어나르는 컨베이어 벨트는 총 32개 라인, 4㎞에 달하지만 지금은 19개 라인, 1.8㎞만 사용한다. 이마저도 올 6월부터는 가동하지 않는다. 이미 3월29일을 마지막으로 채탄작업이 중단돼 더 이상 석탄을 캐지 않고 있다.

다만 이미 캐낸 석탄이 선탄장 산 중턱까지 쌓여 있고 이를 마저 처리해야 할 마지막 임무가 남아 있다. 한적해 보였던 선탄장은 나름 여전히 바쁘게 돌아가고 사람도 남아 있었다.

■‘마지막 여성 광부’=선탄장의 컨베이어 벨트는 구렁이가 똬리를 튼 것처럼 광산을 휘감고 있다. 길이 4.8㎞의 벨트 중간쯤, 45㎡ 안팎의 작은 공간 안에서 5명의 여성 노동자가 열심히 검은 돌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천장을 통해 연결된 벨트에서는 석탄 더미가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쏟아진다.

탄가루가 날려 금세 목이 막히고 앞도 잘 보이질 않는다. 바로 옆 동료의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열악한 공간이었지만 이들은 쏟아지는 석탄 더미에서 일사불란하게 상품가치와 칼로리가 높은 정탄을 골라냈다. 취재진의 눈에는 다 똑같은 검은 돌이었지만 이들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의 일부인 것처럼 빠른 손놀림으로 석탄더미를 분류했다.

이들은 ‘선탄부’, 탄광의 유일한 여성 노동자다. 지하갱도에 들어가지 않을 뿐 분진과 소음, 고속의 컨베이어 벨트 등 선탄부의 작업 환경과 노동 강도 역시 위험하고 열악하긴 마찬가지다. 지하에서 사고의 위험과 공포를 마주하며 일하는 채탄부, 굴진부에 비해 저임금이지만 탄광에서 이들은 어엿한 광부이자 동료로 대접받는다. 6월 장성광업소 폐광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다. 쌓여있는 석탄 더미에서 정탄을 모두 골라내고 나면 이들도 광업소를 떠나야 한다.

선탄부 중 가장 활발한 성격으로 사실상 리더 격인 손기애씨는 “석탄더미 중에 정탄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10여년을 광업소에서 일했다. 딱 보면 정탄, 괴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작업 방법을 거침없이 설명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묻어났다. 설명을 듣고 나니 검은 돌로 보였던 정탄이 카메라의 플래시를 반사해 찰나의 은은한 빛을 뽐냈다. 정말 보석처럼 보였다.

◇15일 태백 장성광업소 철암역두 선탄장. 탄광 내 유일한 여성 노동자인 선탄부가 일사분란하게 쏟아지는 석탄더미에서 정탄을 골라내고 있다. 신세희기자

■“울면서 들어와 울면서 나간다”=강원일보 취재진의 방문에 선탄부들은 가동 중인 컨베이어 벨트를 잠시 멈추고 휴식 시간을 가졌다. 작업장 바로 옆 휴게실에서 선탄부들은 답답한 방진마스크와 귀마개를 벗고 믹스커피를 타 나눠 마시며 한숨을 돌렸다.

석탄산업 전성기 선탄부들은 일일 3교대 고강도 노동에 시달렸다. 당시만 해도 광산사고로 막장에 남편을 묻은 광부의 부인들이 선탄부로 일했다. 하지만 석탄 생산량 감축이 이뤄진 이후에는 수십명 규모의 1팀으로 운영해 왔다. 사고도 줄어들면서 선탄부는 더 이상 산업재해 피해자 가족이 아닌 자발적 취업으로 바뀌었다. 2022년 광업소의 마지막 구조조정이 있었고 당시 11명의 팀원 중 고참 순으로 6명이 광업소를 떠나 마지막 5명이 남게 됐다. 당시 선탄부 휴게실은 울음바다였다고 한다.

5명의 마지막 여성 광부 중 막내 김진희씨는 올해 53세다. 김씨는 “1971년생이다. 아직 일할 나이인데 광업소가 문을 닫는다고 하니까 많이 아쉽다”면서 “오늘 막장에는 전기도 끊겼다고 하더라. 광업소 전체가 뒤숭숭하다”고 씁쓸함을 애써 삼켰다.

손기애씨는 “처음에는 울면서 (광업소)들어왔는데 지금은 자부심도 있고 회사가 문 닫으니까 서운하다. 모두 나갈 땐 울면서 나간다”면서 안타까워했다.

손씨는 또 “강원일보가 더 빨리 오셨어야 했다. 이제 두 달 뒤면 탄광 문을 닫는다... 우리 아직 다들 젊고 일할 수 있는데 광업소에서 나가면 태백에서는 일자리가 없잖아”라며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태백시를 살려 달라고 애원하고 싶다”고 강하게 말했다.

■광부이자 엄마, 아내=선탄부 휴게실 한편에는 각자 집에서 가져온 재료들로 만든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매일 각자 반찬과 먹거리를 조금씩 싸 들고 와 점심을 함께 만들어 먹는다. 일터 밖에서는 주부인 이들은 알뜰함이 몸에 배어있다. 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탄가루가 날리는 선탄장에서 10여년을 끈끈하게 함께 일해 온 이들은 서로 의지하는 동료 이상의 관계다. 오전 8시에 출근해 오후 3시면 선탄작업이 끝난다. 광업소 목욕탕에서 탄가루를 씻어내고 발걸음을 재촉해 집에서는 가족들의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자녀들을 돌본다.

가끔 회식을 하면 삼겹살, 태백 물닭갈비가 단골메뉴다. 분진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효과가 탁월하다고 전해지는 ‘광부의 메뉴’다.

손기애씨는 “광부들이랑 똑같이 삼겹살, 물닭갈비를 자주 함께 먹지만 술은 잘 못한다(웃음). 아무래도 평소 건강을 챙기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말했다.

탄가루와 소음에 종일 시달리지만 이들의 처우는 탄광 노동자 중에 가장 열악한 편이다. 한 선탄부는 “예전 선배들은 모두 정규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비정규직으로 들어와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탄광의 다양한 직종 중에서 선탄부는 경비직과 함께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다. 저임금과 사고 위험, 작업장의 분진, 굉음은 물론 진폐증 등 후유증의 위협까지 견뎌내는 이유는 엄마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10여년 이상 굴진부로 일했던 김효연 장성광업소 선탄과장은 “광업소 직원들은 광부, 선탄부 등 직종에 상관없이 자녀의 대학 학비를 모두 지원하고 있다. 선탄부로 일하며 자녀 3명 모두 대학 공부를 가르친 어머님도 있었다”며 “자신은 힘들고 위험하지만 자녀들의 공부를 가르칠 수 있다는 점은 이들이 버텨내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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