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상 일도 잊게 만든다는 바둑은 도대체 누가 언제 무슨 동기로 만들었을까. 약 4,000년의 역사를 지녔다는 문헌의 기록만 봐도 오랜 세월 인류와 함께 했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바둑, 그곳에 오묘한 삶의 진리가 있을 줄이야.
나와 바둑과의 인연도 어언 50년이 됐다. 그랬던 내가 한때 식칼로 무를 자르듯이 바둑과 절연(節連)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담배라는 복병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한 모금도 피지 않다가도 유독 인터넷 바둑을 둘 때마다 피워대기 시작했다. 그건 지나친 승부욕을 지닌 못된 성격 탓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담배를 피웠다 하면 묘수가 나와서 상황을 역전시키곤 했으니까, 담배야말로 우군 중의 우군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지배했다. 하루 저녁 바둑 세 판에 한 갑의 담배는 정상적인 몸을 좀먹기 시작했다. 기침과 가래가 동반하고 숨마저 가빠 오기 시작한다. 며칠을 고민하던 나는 급기야 바둑을 접기로 했다. 우선 살아야 한다는 강박증이 엄습했다.
그랬던 내가 20년 만인 지난해에 다시 바둑돌을 잡기 시작했다. 군수배 바둑대회가 있으니 함께 참가하자는 선배의 부탁 때문이었다. 왕년에 내 실력을 알고 있던 선배로부터 빈자리를 메워 달라는 간곡한 청탁을 뿌리칠 수 없었다. 종심(從心)이 가까워져 오면서 가장 좋아했던 바둑이라는 취미를 되살리고 말았다.
협회에 가입까지 하고 예전 못지않은 바둑 실력으로 기존 회원들로부터 다크호스라는 칭호까지 얻게 된 나는 급기야 올해 4월 삼척시에서 있었던 강원도 어르신 체육대회 바둑 종목에 우리 군(郡)대표로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하는 성과를 이뤘다. 바둑을 다시 시작했으나 담배는 물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 인생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말인가. “좀 지면 어때” 하면서 초연한 자세로 바둑판 앞에 앉는다. 그러니 몸도 정신도 좋아하고 승률도 올라간다.
바둑 두는 사람이 지켜야 할 열 가지 가르침이 있다. 위기십결(圍棋十訣) 중 첫 번째 가르침은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너무 이기려고만 하지 말라는 뜻이다. 생존경쟁의 치열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은 남을 이겨야 하는 강박관념 속에서 오늘도 사투를 벌이는 모양새 아닌가. 너무 이기려고만 하다 보면 자신의 약점이 드러나고 결국 그 약점으로 인해 인생을 그르치게 된다는 경고의 뜻이라고 생각된다.
훌륭한 인성을 지닌 자녀로 만들고 싶다면, 바둑을 가르치라고 한다. 삼라만상의 조화로움이 그 속에 있고 그걸 깨치고 배우다 보면 스스로 좋은 인성의 소유자로 길들인다는 얘기다. 공자가 이르기를 바둑 두는 것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보다 어진 일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을 벗어나 세계로 전파되던 바둑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두 점을 깔고도 인공지능(AI)에게 지는 상황이 되자 인간 스스로가 무너져 버린 격이 된 것이다.
만우청락이라 근심을 잊게 하는 순수한 즐거움을 제공했던 바둑이 역사 속 유물로 사라지지 않도록 후진 양성에 발 벗고 나서야 하지 않을까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