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메트로폴리탄 뉴욕 핫플의 어제와 오늘]특별한 프러포즈의 순간엔 늘 ‘티파니 다이아몬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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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이래 세계최고 보석브랜드로 유명인들의 사랑 독차지
‘주얼리'' 개념에 다양한 원석 포함시켜 산업 범위 확대 공헌
시대 앞선 기획·생산·마케팅으로 소비자 어필 차별화 성공

◇뉴욕 5번가에 있는 티마니 앤 코(Tiffany & Co) 본사 빌딩 정문. 5번가는 뉴욕을 대표하는 관광 명소 중 하나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수많은 럭셔리 주얼리 브랜드 가운데 오랫동안 최고를 달려온 원톱 브랜드가 하나 있다. 바로 ‘티파니 앤 코''(이하 티파니)다. 보석의 역사와 전통이 깊은 유럽의 내로라하는 주얼리 브랜드들이 이를 넘어서려 경쟁하고 있지만, 결혼을 앞둔 선남선녀들이나 아름다움을 뽐내려는 요조숙녀들의 쇼핑리스트 제일 위에는 아직도 ‘티파니''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 오랜 세월동안 이 럭셔리 브랜드가 쌓아온 ‘최고''라는 이미지를 그 어느 회사도 따라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젠 티파니라고 하면 남녀노소 누구나 어렴풋이 보석과 관련된 유명 브랜드 정도로 알고 있고, 어떤 사람은 ‘티파니? 그게 어떤 보석이었더라?'' 하고 물을 만큼 주얼리 세계의 대명사가 됐다. 이 브랜드가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된 데에는 배우 오드리 헵번이 나오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1961)'' 덕이 크다. 오드리 헵번이 그녀만의 순수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허영심 가득한 팜므파탈로 분한 이 영화에서 이른 새벽 택시에서 내려 한참을 티파니의 쇼윈도를 쳐다보며 크루아상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이 당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티파니는 누구나 한번쯤, 하나쯤 갖고 싶은, 선망의 대상, 여인들의 로망이자 꿈, 이런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영화 속 한 장면만 가지고 지금의 티파니를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티파니는 1837년 설립된, 무려 2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레전드 기업(예를 들어 샤넬은 1913년, 루이비통은 1859년 창업됐다)이다. 지금 티파니의 영광은 그 무수한 세월 동안 전 세계인,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한눈에 사로잡아 온 지난한 역사가 쌓여 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5번 애버뉴와 57번 스트리트 사이에 있는 현재의 티파니 스토어. 티파니는 현 위치로 1940년에 이사했다.

티파니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Charles Lewis Tiffany)와 존 영(John Young)이 ‘티파니 앤 영(Tiffany & Young)''이라는 이름으로 창업했다. 당시 티파니가 뉴욕주 코네티컷의 거부였던 부친으로부터 1,000달러(당시로선 거금)를 받아 창업했다고 하는데, 처음엔 말안장, 지팡이, 안테나, 그릇 등 잡동사니들을 파는 조그마한 상점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서커스단에서 사육되다 늙어 죽은 코끼리 가죽을 구해 가죽 제품을 만든다든지, 국가사업에서 버려진 케이블들을 수거해 잘라 판다든지,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돈이 될 만하면 닥치는 대로 장사하는, 거의 묻지마식 잡화점이었다. 최초의 티파니는 로어 맨해튼 259 브로드웨이에서 출발했는데, 이후 네 차례 이사해 현재의 5번 애버뉴 57번 스트리트에 자리 잡은 건 1940년 이후이다.

◇5번 애버뉴와 37번 스트리트 사이에 있었던 1910년 티파니 스토어. 자료: New York City, Yesterday & Today(1990)

티파니가 보석류에 집중하기 시작한 건 1845년 최초로 티파니 이름으로 금을 세공해서 판매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지금의 ‘티파니 앤 코(Tiffany & Co)''로 회사 이름을 바꾸고 자체 디자인한 은 제품을 선보였는데 이게 큰 흥행을 거두게 된다. 이 성공을 계기로 티파니는 주얼리 비즈니스에 올인(All in)하게 되는데, 최초로 성공한 보석이 진주 제품이었다. 당시에는 진주 양식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희귀한 자연산 진주로 만든 티파니 진주 제품들은 상류층의 상징처럼 상당한 고가에 거래됐다. 링컨 대통령의 영부인(Mary Todd Lincoln)도 주요 고객중 하나였다고 하니 상류층에 얼마나 인기였는지 가늠할 만하다.

그러나 티파니의 또 다른 도약을 이끈 건 뭐니 뭐니 해도 다이아몬드였다. 당시 혁명의 여파가 계속되던 유럽은 극심한 정치적 불안으로 다이아몬드 등 사치재 값이 폭락하였는데, 프랑스의 마지막 왕 루이 필리프의 부인(Maria Amelia)이 쓰던 왕관이 마침 매물로 나와 헐값에 살 기회가 생겼고 티파니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 다이아몬드를 티파니의 주력 주얼리로 가져가게 된 최초의 계기가 됐다. 당시 언론들은 티파니에 전시됐던 이 왕관 속 다이아몬드를 가리켜 ‘King of Diamonds''라고 부르며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뒤 이어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이 프랑스를 떠나면서 남긴 보석들을 프랑스 재무부로부터 헐값에 매입(50만달러)한 것도 티파니의 위상을 높이는 커다란 계기가 됐다.

티파니의 많은 역사 가운데서도 ‘티파니=다이아몬드''라 할 만큼 티파니 브랜드의 위상을 한껏 높이게 된 정말 중요한 계기가 하나 있었는데, 1870년대 남아공에서의 대규모 다이아몬드 채집이 그것이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상류층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다이아몬드 위주로 치장하던 다이아몬드 전성시대였고, 티파니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티파니는 1878년 남아공에서 발견된 287.42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을 매입해 그 유명한 ‘티파니 다이아몬드''(세공 후 128.51캐럿, 90파셋)를 탄생시킨다. 지금도 티파니 뉴욕 5번가 플래그십 스토어에 상징처럼 가끔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이 전설적인 다이아몬드는 1961년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 홍보를 위해 오드리 헵번이, 2019년 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영화 ‘스타 이즈 본''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가수 레이디 가가가 착용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티파니는 일반인들의 주얼리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19세기 말까지는 다이아몬드, 금, 은을 제외한 색상 있는 광물 가운데 오직 루비와 에메랄드만 보석으로 취급됐다. 그런 인식이 1879년 광물학자 조지 쿤츠(George Kunz)가 티파니에 합류하면서 획기적으로 바뀌었는데, 쿤츠는 다양한 희귀 원석을 발굴해 자체적으로 디자인해 판매함으로써 주얼리의 범위 자체를 넓혔다. 이때 새롭게 인식된 보석들이 아쿠아마린(Aquamarines), 토파즈(Topazes), 터키석(Turquoise), 블루사파이어(Blue sapphire) 등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판매상품을 혁신적으로 재창조해 소비자들에게 어필함으로써 판매망을 넓혔다는 이야기인데,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에 티파니의 기획, 생산, 마케팅 전략이 얼마만큼 유연하게 시대를 앞서 갔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시 쿤츠는 티파니에서 전시 중이던 미국산 희귀 원석 컬렉션을 1889년 파리 전시회에 공개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보다 다양한 원석(준보석)을 주얼리의 개념에 포함시키려는 움직임이 세계적으로 확산됐고, 주얼리 인더스트리 자체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얼마 후 어느 뉴욕의 거부 컬렉터가 이 원석 컬렉션을 통째로 매입하게 되는데, 그가 바로 월스트리트 거대 은행 제이피 모건(J.P.Morgan)의 창립자 John Pierpont Morgan(1837~1913년)이다. 그는 이 컬렉션을 다시 뉴욕 자연사박물관(New York Musem of Natural History)에 기증하는데, 지금도 이 희귀원석 전시관은 자연사박물관의 인기 섹션 중 하나로 관람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최재용 한국은행 강원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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