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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여행 '라떼는 말이야~']하늘과 맞닿은 굽이굽이 고갯길…흙먼지 날리며 동해바다 가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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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 대관령

◇1960년대 후반 대관령의 모습. 흙먼지가 날리는 고갯길 비포장 도로 좌측으로 보이는 한 민가의 풍경이 이채롭다(맨 위 부터), 강릉청년회의소가 세워 놓은 강릉 방문 환영 입간판과 본보 취재차량, 삼륜차.

과거 목탄차 다니던 그 시절

하루에 다 못넘고 민가서 숙박

안전펜스 없는 비포장길 아찔

영동고속도 건설 전까지 애용

태백산맥의 관문인 대관령은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와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리 사이에 위치한 고갯길이다. 오랜 옛날 서울이나 영서지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산을 지나 굴면이, 원울이재, 제멩이, 반젱이, 웃반젱이를 거쳐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이 대관령 옛길은 국가가 지정한 명승 제74호이기도 하다.

고개가 너무 험해서 오르내릴 때 '대굴대굴 크게 구르는 고개'라고 해서 '대굴령'으로 불리다 대관령이 됐다는 얘기와 영동지방으로 오는 '큰 관문에 있는 고개'라는 뜻에서 이름이 지어졌다고 그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사람들이 겨우 지나다닐 정도의 오솔길 정도였던 대관령이 도로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은 고형산(高荊山·1453~1528년))이란 선각자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고형산은 서울과 강릉을 편하게 오갈 수 있도록 길을 넓혀 교통 및 조선시대 동해안의 물류 혁신을 이룬 횡성 출신 인물이다. 1507년(중종 2년)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사재를 털어 당시로서는 엄청난 공사였던 대관령길을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로 확장했다. 대관령이 제대로 된 도로로 기능할 수 있게 한 그의 업적은 높이 살 만했지만 병자호란 터지면서 사후 110년이 흐른 후 '역적'으로 몰리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당시 주문진에 상륙한 청군들이 이 도로를 따라 한양을 쉽게 함락할 수 있었고, 이에 대노한 인조의 명으로 고형산의 묘를 파내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

하지만 후에 이에 대한 무고함이 밝혀지면서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명예회복은 이뤄졌다고 한다. 일부 학자는 이에 대해 단순한 전설 정도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당히 드라마틱한 사연들을 품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일제강점기인 1917년 8월 조선총독부의 대관령 치도계획에 따라 대관령도로가 새롭게 생겨나면서 우리의 조상들이 수많은 사연과 애환을 품고 넘던 대관령 길은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된다.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대관령 넘는 것은 한결 편리해졌다.

하지만 가파른 산길을 꼬불꼬불 돌아 오르게 만들어져 있어 비닐봉투(?) 준비는 필수였고,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운전자들은 운전대를 부여잡고 식은땀을 흘리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 길도 7개의 터널과 교량 33개로 이뤄진, 대관령 아래쪽을 관통하는 새로운 영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구 영동고속도로'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지방도 456호선으로서의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사진은 영동도속도로가 건설되기 전 대관령의 모습이다(사진 1). 산 위의 집 귀퉁이를 돌아 나온 버스는 비포장 도로 위에 먼지의 흔적을 잔뜩 남기고는 달려 나오고 있다. 오른쪽으로 산들이 까마득하게 보이는 것이 마치 하늘 위를 달리는 듯하다. 그런데 도로 바깥쪽으로 안전 펜스는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면 무섭기까지 하다. 하지만 집 앞의 한 아낙네와 아이는 버스의 출현(?)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집안일에 바쁘다.

“허허벌판. 이 높은 곳에서 어찌 살았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집을 지탱하는 작은 석축 아래로 산에서부터 연결된 대나무가 보인다. 그 끝에 물이 솔솔 나오고 고무대야 위에 떠 있는 바가지도 눈에 띤다. 꽤나 많은 사람이 이곳을 스치며 물 한잔의 휴식을 취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시 강원일보 기자가 이 장면을 포착하고 사진으로 남긴 것도 아마 그런 이유로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 아닐까. 대관령 고갯길 언저리를 살아갔던 이들이 물을 이런 식으로 조달했으니 먹을거리 등 나머지 것들도 다 나름의 계획이 있었겠다 싶다.

목을 축인 강원일보 기자는 부지런히 대관령을 넘어 강릉을 향한다.(사진 2) 멀리 보이는 검은 지프차가 바로 당시 강원일보 취재차. 강릉청년회의소가 세워 놓은 입간판이 취재진을 반긴다.

“아름다운 강릉입니다. 오서오십시요.”

과거 목탄차가 다니던 시절에는 대관령을 한 번에 넘을 수 없어 민가에서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기도 했다. 대관령 중간은 아래반정과 윗반정이 있었다. 아래반정은 현재 대관령 1호터널 아래쪽 초목교 근처에 있었고 윗반정은 지금의 대관령옛길과 국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1968년부터 1969년까지 215공병대가 구 영동고속도로 작업을 위한 자갈을 까는 공사를 진행 하면서 사진 속의 민가는 사려졌다. 대관령은 양양~서울 고속도로가 개통하기 전까지 동해안으로 가는 최단거리 도로로 많은 국민이 찾는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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