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성

[역사속의 강원인물]조충장군 연보

◇조순 전 부총리가 2006년 10월25일 횡성읍 정암리 조충 장군 신도비와 사당이 있는 세덕사를 찾은 모습. 조순 전부총리는 조춘 장군 신도비에 새겨진 2,500자의 비문을 직접 지어 줬다.

■ 1171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자지봉(紫之 峰) 아래 굴바위에서 횡성조씨 7세손 조 영인(趙永仁)과 파평윤씨 자고의 딸 사이 에서 차남으로 출생. 생후 1개월만에 어 머니 윤씨를 여읨.

■ 1190 진사과(進士科)에 급제.

■ 1196 금나라에 사신으로 감.

■ 1209 국자제주(國子祭酒, 오늘날의 국립 대학 총장)로서 추영수(秋穎秀) 등 66인 을 선발.

■ 1211 대사성 한림학사(大司成 翰林學士) 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과거시험을 관 장)를 겸임하며 진사과(進士科)의 강창서 (姜昌瑞) 등 28인을 선발.

■ 1216 추밀부사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 承旨)로 상장군을 겸임.

■ 1216 음력 8월 거란이 고려를 침입. 고려 에서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정숙첨(鄭叔 瞻)을 행영중군원수(行營中軍元帥)로 하 고 조충을 부원수로 삼아 출정. 정숙첨은 퇴패하고 조충은 군사를 독려하여 정숙 (整肅)시킴.

■ 1218 음력 7월 고려는 계속되는 패배에 다시 군을 정비하여 수사공 상서좌복야 (守司空尙書左僕射)로 있던 조충을 다시 기용.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로 삼고, 병에서 회복한 김취려를 다시 병마사로 삼았으며, 정통보(鄭通寶)를 전군으로, 오수기(吳壽祺)를 좌군으로, 신선주(申宣) 를 우군으로, 이림(李霖)을 후군으로, 이적 유(李迪遺)를 지병마사(知兵馬事)로 각각 삼아 거란족 토벌에 나가게 하고, 또 여러 도의 안찰사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돕도록 하였다. 음력 9월 6일 조충 은 군사를 보내 동주에 이르러 동곡(東谷) 에서 거란족을 물리쳐, 그들의 모극(毛克, 또는 謀克:百夫長) 고연(高延)과 맹안(猛 安:千夫長) 아로(阿老)를 사로잡고, 성주 (成州:지금의 평안남도 성천)로 나아감. 12월 김양경(金良鏡)에게 몽고군에게 줄 쌀 1,000석을 소송하게 함.

■ 1219 음력 1월 고려와 몽고 연합군에 의 해 강동성의 거란족 완전히 소탕. 거란 포 로를 고려 백성으로 삼아 각 도의 주현(州 縣)에 나누어 토지를 주어 농사를 지으며 모여 살게 함. 이를 거란장(契丹場)이라고 함. 개선하여 정당문학(政堂文學) 판례부 사(判禮剖事)가 되고 이어 수태위동중서 문하시랑 평장사수국사(守太尉同中書門 下侍郞 平章事修國史)를 겸함.

■ 1220(50세) 별세. 시호는 문정(文正). 개 부의동삼사 문하시중(開府儀同三司門下 侍中)으로 추증. 고종의 묘정(廟庭)에 배 향. 조선조에 이르러 고려 태조(太祖), 고 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과 함께 고려 충신 16인 열위(列位)의 한분으로 숭의전에 배향.

■ 1925 9월 횡성 조씨 문중이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삼원수골에 세덕사(世德祠) 건립.

■ 1926 외후손 최씨에 의해 지석(誌石) 발견.

■ 1948 묘지를 지금 북한땅인 개성군 상도 면 연동의 태조왕비제릉(太祖王妃齊陵) 서편 언덕에서 현재의 횡성군 정암3리 망 백으로 옮김.

■ 1988 세덕사를 공근면 상동리 삼원수골 에서 횡성군 횡성읍 정암리 산207-5번지 로 이전.

가장 많이 본 뉴스

    피플&피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