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 장군 조충(趙沖)의 묘는 원래 개성 인근에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그 위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무덤의 지석(誌石)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묘의 주인을 분명하게 밝혀낼 수 있었다. 주인을 알 수 없었던 무덤 앞에 묻어놓은 판석(板石)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公)의 이름은 충(沖)이고 자(字)는 담약(湛若)이며 횡천현(橫川縣) 사람이다.' 아마 무덤의 주인을 놓고 다른 집안과 논란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석이 발견됨으로 해서 정리가 된 모양이다. 조상의 묘를 되찾은 후손들은 광복 이후 남과 북이 갈라지게 되어 왕래가 불편해지게 되자 지금의 자리(횡성군 정암리 덕고산 아래)로 이장을 하였는데 이 마을은 횡성 조씨 집성촌이다. 그리고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 삼원수골에 있던 사당인 세덕사(世德祠)도 옮겨왔다. 세덕사는 조충과 조충의 아버지인 시중(侍中) 조영인, 그리고 조충의 아들인 조계순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역사 속의 강원인물, 그들이 꿈꾼 삶'의 인물들을 탐방하는 날은 거의 대부분 날씨의 위력이 대단한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올 들어 가장 더운 날이었다. 온도계는 32도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다른 산으로 돌아가면 땀으로 목욕을 할 게 분명했다. 횡성우체국 앞에서 만난 권 기자와 나는 길을 재차 확인하며 횡성의 남동쪽에 자리한 덕고산을 향해 떠났다. 길이란 게 그런 거 아닌가. 한 번 벗어나면 다시 되돌아가기 힘든 거. 더군다나 그 길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길이라면……. 그렇게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권 기자와 나는 최소한 일사병엔 걸리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정표를 놓치지 않으려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조충(1171~1220년) 장군이 살았던 시대를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는 모두 다섯 임금을 섬겼다.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이 그들이다. 명종(明宗)은 정중부의 반란으로 즉위했는데 이때부터 고려는 반란과 민란의 시대, 그리고 무신정권의 시대로 접어든다. 무신정권 주요인물들의 이름은 이렇다. 이고,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최충헌에 의해 내쫓긴 명종의 뒤를 이어 신종(神宗)이 54세에 즉위하는데 이 시기에는 최씨 무신정권의 장기집권 기반이 마련되는 한편 건국 이래 최악의 민란이 도처에서 발생한다. 신종이 6년4개월의 재위를 끝으로 사망하자 희종(熙宗)이 즉위하는데 최충헌에 의해 7년11개월 만에 폐위된다. 환갑을 앞둔 나이 60에 강종(康宗)이 즉위하나 오랜 유배생활로 병든 몸이었기에 역시 1년8개월 만에 생을 마감하고 고종(高宗)이 뒤를 잇는다. 고종 시대에 최씨 무신정권은 안정기에 접어드나 국제정세는 큰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몽고의 흥기로 아시아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데 고려도 그 여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거란과 여진의 침입, 그리고 30년에 걸쳐 총 7차의 침입을 한 몽고가 바로 그들이다. 조충은 거란과 여진의 침입이 거듭되는 그 시기 역사의 한 페이지에 이름을 분명하게 새겨놓고 나이 50에 너무 일찍 명을 달리한 장군이다. 그가 살아서 더 오래 고려의 영토를 지켰더라면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고려의 슬픈 역사가 조금이라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세덕사에 도착했다.
폭우의 여파 때문인지 정암리 세덕사 홍살문의 지붕 격인 통나무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다. 더욱이 횡성 조씨 종친회장님은 병원에 입원해 있어 만날 수가 없었다. 종친회장님 댁에 보관하고 있는 지석(誌石) 역시 볼 수가 없어 아쉬웠다. 세덕사 안내판의 글씨도 벗겨져서 힘들게 읽어야만 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종친회 총무님마저 출타 중이었다. 세덕사 입구의 풍채 좋은 소나무 숲에 자리한 신도비를 훑어보고 묘소로 향했다. 날은 무더웠고 땀은 구슬처럼 쏟아졌다. 덕고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자리한 묘역의 자그마한 그늘 아래서 조충 장군의 지석에 기록된 내용을 떠올렸다.
1196년(명종 26년) 26세에 왕명을 받들어 금나라에 갔을 때 황제의 궁전에서 행하는 예(禮)를 검토하다가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따졌다. 그는 “어찌 대국이 억지로 사람을 예의 없이 만드는가. 나는 차마 우리 임금의 이름을 피해 모(某)라고 칭할 수 없다.” 후일 명종은 이 말을 듣고 “세상 사람들이, 임금의 명령을 욕되지 않게 한 이가 있다고 했는데, 그대를 일컫나 보다”라고 하였다. 1208년(희종 4년) 병마사로 동북로에 나가 폐단을 없애고 이익을 늘리며 판결하는 일이 흐르는 물과 같아 마음을 얻었다. 1216년(고종 3년) 부원수로 거란적(賊)을 막으려 출정하였으나 패배해 파직을 당했다. 1217년(고종 4년) 여진의 도적들이 압록강을 넘어오자 흩어지게 만들어 저지했고 이듬해 거란적을 격파해 명예를 회복했다. 1219년 다시 전장에 나가 성(城)을 놓고 다투는 전투에서 두 번이나 크게 승리를 거뒀다. 1220년(고종 7년) 8월28일 병에 걸려 9월3일 돌아가셨다. 임금은 슬퍼하며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다.
조충 장군이 태어났다는 이야기가 내려오는 삼원수굴과 아버지 조영인과 시를 읊은 곳으로 전해지는 선강정(仙降亭)터가 있는 횡성군 공근면 상동리로 가는 내내 나는 무덤 앞에 묻어놓는다는 지석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물론 모든 이의 무덤 앞에 지석이 묻히지는 않았겠지만. 그것은 무서운 기록임이 틀림없었다. 무덤의 주인을 쉽게 찾기 위한 용도로 쓰였다지만 한 사람의 일생을 죽어서까지 짊어지고 가는 것일 수도 있었기에. 더위가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공근면 상동리 삼원수골을 알리는 화강암 앞에서 왼쪽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이 마을은 횡성 조씨 성을 가진 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해서 조촌(趙村)이라고도 부른다. 너무 먼 옛날의 일이라 조충이 이 마을에서 태어난 것인지 아니면 그 집안의 근거지인지 확실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마을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이야기이니만큼 그것이 지닌 힘도 분명 있는 것이리라. 당대의 기록이 소홀하게 다룬 것들 속에서 얼마나 풍부한 이야기가 되살아나는지 굳이 확인해 보자.
삼원수골 끝에 자리한 불영사라는 작은 절 뒤편 산자락에 석굴이 있었다. 깊지 않은 석굴 안쪽에서 자그마한 부처가 바깥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조충은 이곳에서 태어났는가. 아니면 어머니가 기도를 드리다 조충의 점지를 약속받았는가. 지석에 기록된 조충의 용모와 성격은 대략 이렇다. '공은 체격과 얼굴이 크고 장대하였으며, 위엄이 있는 몸가짐이 안에 꽉 차 있으나 겉으로는 부드러워 보였다. 어려서부터 손님맞이를 즐겨했으며 날마다 친구들과 어울렸다. 술을 마실 때에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으며 조금도 삼가는 기색이 없었다. 독서를 즐겨서 보따리에 여러 학자들의 책들을 넣고 다녔는데 그중에서도 시경과 역경을 특히 많이 읽었다.' 그렇다. 그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문무를 겸비했던 것이다. 나는 시원한 공기가 감도는 굴 속에서 굴 밖을 바라보았다. 바깥세상은 무더웠고 풀벌레 소리 또한 한창이었다. 그래도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삼원수굴에서 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 선강정터에 도착했다. 정자가 있던 절벽 위는 펜션이 차지하고 있었다. 절벽 아래서 물놀이를 하는 가족도 보였다. 나는 물 건너편에서 그가 아버지와 함께 읊은 시가 무엇일까를 상상했다. 지석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놀리고 있는 땅에 별장을 지어 샘도 파고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독락원(獨園)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근무시간이 끝난 후 친척, 자제, 문생(文生), 오래된 친구들을 즐겨 데리고 와서 작은 술자리를 열었다. 거문고와 술로 스스로 즐기는 생활을 하였다.' 어쩌면 독락원은 선강정의 또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아,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따라다니던 궁금증 하나는 끝내 풀지 못한 채. 무신정권의 핵심이었던 최충헌은 조충보다 한 해 먼저(1219년) 사망했다. 두 사람의 역학관계는 과연 어떠했는지가 바로 그것인데 이런 기록 한 줄을 나는 겨우 찾아냈다. '조충 등이 개선할 때(거란군을 대파하고) 최충헌이 그의 공 세운 것을 시기하여 환영하는 예식을 정지시켰다.'
한 생애를 어떻게 건너갈 것인가, 그것은 내게 있어 아직도 멀고 먼 일이었다. 옛 사람들은 내게 그 방법을 간곡히 가르쳐주려 하는데 나는 더위를 핑계로 횡성 공근농협 옆 구멍가게 앞에서 빙과나 쩝쩝 빨고 있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