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는
그가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사진 한 장에 의지해 차를 몰아
구성포리 가락재에 도착했으나
사진 속 집은 그가 살았던 집이 아니었다
옛날 개울을 돌아나가던 길이
현재의 가락재로 바뀌면서 초가집은 헐리고
후손들도 화촌으로 이사를 나갔다고 한다
주변의 밭과 밭 너머 잣나무 우거진 산자락
부친 김지성의 묘소가 남은 전부였다
서울, 미국 버지니아, 다시 서울, 상해로의 망명
몽골, 파리, 미국, 모스크바, 평양…
홍천의 산골인 구성포 가락재에서
그가 걸어간 먼 길을 더듬더듬 헤아렸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북으로 끌려가는 그의 눈물을 떠올린다
그 눈물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었을까
그건 분명 힘없는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1948년 4월 우사(尤史) 김규식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대회의 축사를 이렇게 마무리했다. 남북 연석회의와 남북협상이라는 큰 과제를 앞둔 시점이었다.
“남북회담의 첫 결과가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 일은 우리 손으로 한다고 하였으니, 흥해도 우리 힘으로 흥하고 망해도 우리 손으로 할 것이다. 인제는 막다른 골목이니, 한 번 해서 안 되면 열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하여 생명 있을 때까지 하고야 말 것이며, 할 수밖에 없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는 길이 마지막 길인 줄 알아야 하며, 막다른 길인 줄 알아주시길 바란다.”
그러나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그해 봄 김구와 함께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던 김규식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남한단독총선거에는 '불반대 불참가' 성명 발표를 끝으로 건국 기초작업에 대한 그의 정치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다. 남과 북은 그렇게 서로 다른 길로 접어들었고 결국 동족상잔의 전쟁에 휘말렸다. 김규식은 납북되어 그해 12월 10일 평안북도 만포진 부근에서 민족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나이 70에 눈을 감았다.
강원도 홍천군 화촌면 구성포리는 동래에서 태어난 그가 어린 시절 잠시 머물렀던 곳이다. 인근에는 선친의 묘소도 있다. 사진 한 장에 의지해 차를 몰아 구성포리 가락재에 도착했으나 대부분 그렇듯이 예상과 현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진 속의 집은 그가 살았던 집이 아니었다. 사진 속 집에 살고 계시는 노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개울을 돌아나가던 길이 현재의 가락재로 바뀌면서 초가집은 헐리고 말았고 후손들도 화촌으로 이사를 나갔다고 한다. 남아 있는 건 주변의 밭과 밭 너머 잣나무가 우거진 산자락에 있는 부친 김지성의 묘소가 전부였다. 동래부사의 참모로 일하던 아버지는 상소를 올린 것 때문에 귀양을 갔다고도 하고 면직을 당해 고향인 구성포로 귀향했다고도 전한다. 더군다나 그는 이곳에서 어머니마저 1886년에 사망하자 6세에 고아가 되었고 다시 먼 길을 떠나야만 했다. 그 길은 멀고 또 멀다. 서울, 미국 버지니아, 다시 서울, 상해로의 망명, 몽골, 파리, 미국, 모스크바, 평양……. 강원도 홍천의 산골인 구성포 가락재에서 나는 그가 걸어간 그 뚜렷하게 먼 길을 더듬더듬 헤아렸다. 그 길은 험난한 시대를 살면서 조국의 독립과 통일로 가기 위한 길이었다.
2001년 9월 14일 홍천군 화촌면 복지회관에 모인 학자들은 우사 김규식의 생애와 활동을 놓고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그의 일생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단결 자강을 위해 헌신함으로 일관되었다. 즉 분열된 독립운동의 대동단결과 극단적인 이념대립으로 갈라진 여러 정치세력의 중도통합의 주장으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민족과 조국의 통일을 염원하였던 그의 평생은 오늘날 희망적인 통일을 민족 지상과제로 부여받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적 교훈을 남기고 있다.' 이현희 교수의 논지다. 그러니까 분열과 이념대립이 독립운동의 귀퉁이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또 유병용 교수는 '일제하 국내외에서 좌우익의 민족통일전선운동을 추진하거나 광복 이후 좌우 합작운동을 추진해온 인사들의 경우에는 남쪽과 북쪽 모두로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배척당하는 불운한 생애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전한다. 그 가운데에 김규식이 있는 것이다. 이념과 노선을 초월한 신념을 바탕으로 좌우합작, 남북협상을 주도한 이가 바로 그였으니. '김규식은 당시 국제사회에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가였으며, 중국의 상해를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을 이끌고 나간 거인이었다. 그러나 이미 독립운동 시기에 그가 우려했으며 막고자 했던 민족의 분열, 특히 좌우익 이념의 대립과 정치적 갈등은 광복 이후 계속되어 남북한의 분단상황 속에서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비록 우리 민족이 일본 식민지 상태로부터 해방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분단이 지속되는 한 그가 추구했던 민족 대단결과 통합은 후세에게 남겨진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유 교수의 덧붙인 말이다. 그의 우려는 무섭도록 정확했다. 현재의 우리 역시 그가 우려했던 과제를 제대로 풀지 못하고 남과 북 모두 갈팡질팡하고 있지 않는가.
김효석 기자와 나는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마을 노인이 알려준 우사 김규식의 선친 묘가 있다는 산으로 가보기로 결정했다. 노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묘소의 위치는 산의 중턱 아래여서 한 삼십 분 걸으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길 옆에 차를 세우고 골짜기로 접어든 지 오래지 않아 우리는 이정표 없는 두 갈래의 길을 만났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김 기자는 오른쪽을 선택했다. 우익이었다. 내심 왼쪽을 바라보았던 나는 좌익이었다. 우리는 오른쪽 골짜기로 접어들었다. 어디선가 사나운 벌이 튀어나오거나 잔뜩 독 오른 뱀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있을 것만 같은 험한 길이었다. 왼쪽 길을 고집할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지난 일이었다. 만약을 대비해 나뭇가지 하나를 꺾어 들었지만 믿음을 주진 못했다. 길은 점점 좁아졌고 무성한 풀들이 발목을 잡았다. 작년 원주에서처럼 치악산 꼭대기로 올라가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를 핑계로 결국 우리는 발길을 되돌렸다. 다시 만난 갈림길에서 왼쪽 골짜기를 한 번 바라보았을 뿐 우리는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오른쪽이든 왼쪽이든 아마…… 두 길은 어느 지점에서 분명 만날 것이라는 생각을 뒤늦게 했지만 내겐 신뢰가 부족했다. 길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늘 그런 의혹과 갈등, 고집에 휩싸이기에 우리에겐 우사(尤史) 같은 이가 기다려지는 것이고 더불어 신뢰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해방정국의 김규식에게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극단적인 이념대립과 좌우 갈등으로 극도로 혼란했던 해방정국에서 우사 김규식은 독특한 위상을 지닌다. 그는 온갖 난관에도 불구하고 중도적인 입장에서 좌우를 수렴하며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활약했고, 남북협상을 제의하는 등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로 인해 권력으로부터 배제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견지했는데, 이와 같은 그의 노선은 오늘날 통일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특히 좌우합작의 경우 분단의 위기를 극복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한 최초의 시도였다는 데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경남대 심지연 교수의 문제제기다. 이념은 무엇이고 좌우는 또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어려운 문제다. 나 같은 사람은 감당할 수도 없는 버거운 문제임이 분명하다. 다만…… 아주 작은 바람이 있다면 그 이념과 좌우의 대립이 백성의 피를 부르는 전쟁으로까지 확대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뿐이다. 그것들이 아무리 거창한 명분을 내걸고 있다 하더라도. 심 교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미국에 의해 한반도문제가 유엔에 상정되자 그는 민족의 운명을 남에게 맡겨 분열을 자초할 것이 아니라, 남북의 정치지도자들이 한자리에서 만나 결정하도록 하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냉전체제가 굳어져가는 국제정치 환경 속에서 미국과 소련의 패권경쟁으로 한반도의 남과 북에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면, 민족은 영원히 분열될 것이고 필연적으로 동족상잔이 발생하리라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예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아까운 지도자를 잃었음이 분명하다.
성균관대 서중석 교수는 우사를 이렇게 평한다. '김규식은 지도자로는 보기 드물게 이상(또는 신념)과 식견(또는 통찰력), 현실감각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국제관계를 많이 가진 것도 그러한 조화를 갖게 하는 데 기여하였을 것이다. 세인들은 김규식이 정당을 기피하고 정권 쟁탈전을 못마땅해하는 것을 가지고 학자 정치인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성의 정치인이어서 한국의 정치풍토와는 맞지 않아 정당, 권력 기피증이 강했던 것은 사실이다. 공과 사를 명백히 가르는 강직한 면도 그러한 기피증을 갖게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식견과 현실감각, 공정성이 중도파 민족주의자들로 하여금 김규식을 지도자로 내세우게 한 핵심 요인이 되었다. 바로 그러한 김규식의 면모들이 일제강점기의 민족통일전선, 광복 후의 좌우합작, 남북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던 것이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북으로 끌려가는 그의 눈물을 떠올린다. 그 눈물은 어디에 근원을 두고 있었을까. 그건 분명 힘없는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정치는, 정치인들은 그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홍천=김효석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