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증스런 황동제 돼지한쌍 '복덩이'
·정해년, 돼지해 복을 드립니다.
돼지는 여러 문헌에서 상서로운 징조로 많이 나타난다.
설화문학에서는 집안의 수호신 또는 재화신(財貨神)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돼지 얘기를 하다 보면 서울배재중학교 시절, 이웃에 살던 친구녀석 생각이 난다.
하루는 하교 길에 광화문을 지나 화신백화점 앞을 지나는데, 문득 3~4명의 친구 앞을 막아 서더니 “야! 너희들 이 백화점 주인이 어떻게 해서 부자가 된 줄 알아?”라고 묻는다. 모두 묵묵부답일 수밖에, “너희들도 꿈 한 번 잘 꾸면 돼. 이 백화점 주인이 어느 날 돼지꿈을 꾸었는데 그것도 한쌍의 돼지가 한참 짝짓기하는 꿈을 꾸었다는 거야 알겠지”라고 한다.
어디서 주워 들은 얘긴지 꾸며댄 말인지 알 수 없어서 모두 웃어넘기고 말았다.
【사진1】 복덩어리 황동제 돼지 한쌍
여러 해 전 고미술가게에서 사진모양으로 전시해 놓은 것을 보고 그 해가 개띠해이니 이듬해가 돼지해라 초복(招福)을 상징하는 민속품으로 여겨 값을 지불했다.
제작된 지 오래여서 표면이 검게 변질되긴 했으나 소품다운(5.5●2.5㎝) 앙증스러움도 있어 보인다.
“독자 여러분! 황금돼지해 福 많이 받으세요.”
【사진2】 이규완옹일화집
이규완옹일화집(李圭完翁逸話集)은 1942년 5월15일 강원도(청)에서 일어판(日語版)으로 간행됐다. 편집인은 강원도산업부농정과이고 필자는 요시카와(吉川正一)이다.
이씨는 경기도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에서 태어나 34세에 일본여인과 결혼, 10남매(5남5녀)를 두었다.
19세 청년시절, 구한말 풍운의 정치가 박영효(朴泳孝)의 문하에 들어가 22세에 일본 육군대위 경찰간부를 거쳐, 47세에 강원도관찰사, 49세에 강원도장관(도지사), 57세에 함경남도장관을 역임했다.
이씨를 말할 때에 먼저 친일성을 운운하는 사람도 있으나 파란 많던 한말과 일제강점기를 지내오면서 그 만큼 비도덕적 행실이 지적되지 않은 사람도 드물다고 하겠다.
그의 인성(人性)에 대해 공직자로서 본받을 사안이 비일비재하다.
출장길에 기차는 3등석을 이용했고, 아껴 쓴 출장비로 효자·효부를 포상하였다. 양복 한벌을 평생토록 입고 신발 한 켤레로 30년을 지냈다. 퇴관(退官)하면 농토로 돌아간다는 소신을 지켜 후평·석사동 농장을 자전거로 왕래하며 호미를 들고 농사에 전념했다.
317쪽에 달하는 일화집에는 이러한 감동적인 내용이 수두룩하다.
책의 서두에는 이런 글이 있다.
이씨와 더불어 장년기를 함께했던 박영효는 임종 때 “내가 일생을 통해서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가장 신뢰할 동지(同志)는 이규완이다. 그는 참으로 솔직하고 의협심이 뛰어난 열혈호담(熱血豪膽)한 사람이었고, 비범한 역사(力士)이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한 권의 책은 어느 한 사람의 일화집이기에 앞서 강원도 근·현대사를 상고(相考)함에 있어서 아주 긴요한 사료가 된다고 하겠다.
【사진3】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
대례(大禮)란 중대한 의식으로 관·혼·상·제, 즉위(卽位)의식·대전(大典)을 말한다. 사진의 기념장은 1915년 11월10일 강원도장관 이규완에게 수여했던 것으로, 앞면 양쪽에는 만세기(萬歲旗), 중앙 상단에는 금(金)으로 국화무늬를 새겼고, 뒷면에는 '대례기념장 대정4년 11월'이라 새겼는데, 이 기념장은 극소수의 고위인사에게만 수여했던 것으로 전해온다.
한 가지 참고로 적자면 필자가 강원일보와 인연을 맺고 글을 써 온 지 33년, 연재물만 21년을 집필해 오면서 역사적 고증이나 의문이 생기면 선고(先考)께 문의하곤 했는데 10여년 전부터는 중형(仲兄)인 고미술연구가 유성태(庾星泰)씨에게 의지해 왔다. 본란에서 '대례(大禮)'라 한 게 무슨 행사였는지 분명치 않아 중형에게 문의하였더니 여러 문헌을 탐색해도 석연치 않음으로 다음날 아침, 노구(老軀, 80)에 서울 국립도서관을 찾아가 '대정천황즉위식(大正天皇●位式)' 행사였음을 밝혀 알려주었다.
【사진4】엄비(嚴妃)장례행렬
지난 1월24일(수) 동아일보문화면에는 '사진이 국가 문화재 됐다' 제하에 1909년에 촬영한 사진 1장이 보물로 지정된 내용이 보도되었다.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라도 소홀히 다뤄서는 안 되겠음을 일깨워주었다.
사진은 엄비(1854~1911년)의 장례식 행렬 광경인데 엄비는 본관이 영월이고 증찬정(贈贊政) 엄진삼(嚴鎭三)의 장녀로, 8세의 어린 나이로 입궐하여 민비의 시위상궁으로 있다가 민비가 살해된 후 고종을 모셨고, 아들 은(垠)을 낳아 순헌황귀비라는 칭호를 받았다. 1905년에는 양정중학교 이듬해에는 진명여학교와 숙명여학교의 설립에 거액을 기부하여 서울장안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행적 등으로 사후 국민들의 관심 속에 치러진 장례식은 1911년 8월2일 오전 5시 창덕궁빈전에서 출관되어 청량리 밖 영휘원능(永徽園陵)까지 애도하는 백성들의 운집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도로 양편으로 빼곡이 들어선 초가·기와집들이 인상 깊고, 오른쪽 위 사진은 묘소인 영휘원능이다.
【사진5】이왕전하와 내빈기념촬영
1915년 10월2일 이왕전하 내외가 적십자 조선본부와 애국부인회조선본부 제2회 총회가 열려 참석인들과 함께 창덕궁 비원 주합루(宙合樓)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단위의 가운뎃줄 앉은 이 맨오른쪽(한복)이 이왕비전하(李王妃殿下), 2번째(양장)가 일본귀족인 한원궁비(閑院宮妃), 3번째가 한원궁(閑院宮), 4번째가 이왕전하(李王殿下), 5번째가 이준공전하(李埈公殿下)이다. 앞줄 중앙의 육군 무관복장이 이병무(李秉武), 그 오른쪽이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이었던 민병석(閔丙奭)이다. 뒷줄 중앙이 데라우치총독(寺內總督)이다.
유용태 강원고미술연합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