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작곡계 선구자
-"죽는날도 음악과 함께 있을겁니다"
“그대의 전쟁이 너무도 순수할 땐 천사가 그대의 뒤를 맡아 싸워주리라”
이영자(李英子·71) 전이화대여음대교수가 즐겨 외우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지은 한 싯귀다.
그의 삶이 그랬다.
일제치하에서 태어나 해방, 한국전쟁, 근대화 시절 등 고난의 역사를 여성으로서 딛고 살아올 때 마다 그를 지탱해주던 '잠언'이자 '좌우명'이었다.
이로인해 일과 가정 모두를 완벽하게 이끌어 지난 94년 '제26대 신사임당상'을 수상했고 올해 제2회 '자랑스런 강원여성상'을 받았다.
지난 1931년 원주에서 이근직(李根直)씨의 장녀로 태어난 이 전교수는 부친이 평창군수로 재직하던 초등학교 3학년 시절에 익힌 피아노가 인연에 돼 평생 음악과 연을 맺었다.
부친이었던 이근직씨는 강원도 내무국장을 거쳐 자유당 시절에는 내무장관, 4·19 당시에는 농림부장관을 지낸 정통 내무관료였다.
춘천여고 2학년 당시 해방을 맞은 이전교수는 그 때야 비로소 한글을 접할 수 있었다.
혼란의 와중에서 이전교수가 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음악에 정진하는 길 뿐 이었다.
음악선생도 없이 '쇼팽'과 '바하' 등에 미쳤고 1948년 서울 피아노 콩쿨에 나갔지만 서울와 지방학생의 수준 차이만을 절감한 채 좌절했다.
이전교수는 “내 또래 서울학생들의 야무진 연주를 들으면서 순간 좌절에 빠지기도 했지만 오늘 이 쓰디쓴 고배를 먼 훗날 충만한 기쁨으로 만들리라고 다짐했다”고 회상했다.
1950년 '의사 딸'을 고집하던 부모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이화여대 음악과에 입학했다.
그러던 와중에 일요일 날 서울 충무로에 음악책을 사러 나왔다가 6·25 전쟁 사실을 전해들었다.
이전교수는 6·25가 자신의 삶에 가장 뚜렷한 지표를 심어 준 계기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전교수는 “6·25는 삶에 대한 첫 시련을 주었지만 동시에 용솟음치는 정열과 용기를 주었다”며 “또한 절망은 없다는 것을 내 스스로 터득했다”고 강조했다.
기숙사를 나와 아버지를 찾아 무작정 춘천으로 향했다가 당시 강원도 내무국장이었던 아버지 집이 인민군 사무실로 변했다는 말을 듣고 이전교수는 빈집을 찾아들었다.
빈 농가에 숨어서 야채를 끓여 목숨을 연명하다가 남의 집에서 허드렛을 하며 배고픔을 해결했다.
다시 서울로 향한 이전교수는 가평 인근에서 인천상륙작전 소식을 들었고 서울시청 계단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강원도 선발대 단장으로 온 부친을 만났다.
이 3개월동안 이전교수는 생명의 소중함과 함께 '절망은 없다'란 진리를 온몸으로 체득했다.
그래서 칠순을 맞은 나이에도 작곡발표회를 갖는 등 도무지 지칠줄을 모른다.
이전교수는 “나는 신념이 강한 여지이며 한번 정해지면 반드시 간다”고 자신을 평가했다.
이같은 성격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이전교수는 1956년 문교부가 주관한 전국음악콩쿨 작곡 부문에서 수석을 차지한 후 부모님께 프랑스 유학을 가겠다고 말했다.
좋은 집에 시집을 보내려는 부모와 유학을 가겠다고 딸이 맞선 끝에 결국 딸이 이겼다.
1956년 8월9일 전란끝의 여의도 비행장에서 프르펠러 비행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른 그날의 흥분과 감회를 이전교수는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낯선 이국땅에서 25세의 처녀가 돌봐주는 이 없이 생활한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언어학원과 파리 국립고등음악원만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며 작곡공부에 몰두했고 유학기간중이었던 60년 주불 한국대사관에 근무하던 한우석 외교관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61년 귀국한 이전교수는 23년 동안 이화여대 음대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길렀다.
교수로서, 외교관 남편을 둔 아내로서, 세딸의 어머니로서 이전교수는 억척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남편은 외무부 본부 국장, 차관보를 거쳐 주코트디브와대사, 주인도네시아대사, 주네덜란드대사, 주프랑스대사 등을 역임했다.
이전교수는 현지 주재대사의 부인이자 민간 외교관 현지 음악가라는 1인 3역을 훌륭히 소화했다.
현재 세딸 가운데 두딸은 음악을, 둘째딸만은 경영학 MBA를 마치고 뉴욕에서 생활하고 있다.
음악의 외길인생을 걸어 온 이전교수는 대한민국 여성작곡가들의 명실상부한 선구자다.
특히 96년 대한민국 작곡상을 수상하면서 음악계의 시선을 모았으며 광복 50주년을 맞은 해인 95년에는 기라성 같은 작곡가들을 제치고 '대한민국 찬가'를 작곡하는 영광을 안았다.
이같은 공로로 이전교수는 95년도 서울시 문화상, 2002년도 예술문화대상을 수상한데 이어 86년 '피아노 소나타'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작곡상 우수상, 제27회 대한민국 문화 예술상 대통령상 수상, 94년 올해의 음악가상을 받기도 했다.
국제여성작곡가회 회원, 한국여성작곡가회 초대회장, 국제존타클럽 회원에다 한국음악협회를 비롯한 각종 기관및 단체에서 주최한 콩쿨에서 맡은 심사위원은 셀 수 없이 많다.
이전교수는 81년 여성작곡가회를 창립한 이후에도 아시아작곡가연맹 한국위원회회장을 역임하며 여성과 청소년들을 위한 활동에도 앞장서 왔다.
고인이 된 찬상병 시인의 작품에 곡을 붙인 '편지' '강물' '행복' 등 70여곡의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전교수는 가르치는 일 뿐 만이 아니라 배우는 일에도 평생을 보냈다.
남편이 주 프랑스대사로 재직할 당시 이전교수는 50대 후반의 나이였지만 솔본느 대학의 음악학 박사과정에 정식 학생으로 등록해 공부했다.
모자라는 언어 실력때문에 매일 아침 7시부터 10시까지 대학 부속 어학원에서 공부했고 주2회 음악학 세미나와 심포지엄에 참석한 후 밤에는 대사부인으로 외교계에서 뛰었다.
이전교수는 “견딜 수 있는 굳은 신념의 시계가 큰 기둥으로 나를 받치고 있었다”며 “노력하고 전진하는 순수한 삶에는 하나님의 축복은 넘친다”고 강조했다.
이전교수는 이제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항상 자신감이 넘친다.
그는 끝으로 한 마디를 조심스레 던진다.
“나는 은퇴라는 것은 모른다” “죽을때까지 현직으로 살 것이다”<崔秀永기자·sychoi@kw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