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언중언]출판기념회

‘책씻이’라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글방이나 서당에서 책 한 권을 다 떼었을 때 스승과 동학(同學)에게 음식을 차려 한턱내는 의례다. ‘세책례(洗冊禮)’ 또는 ‘책거리’라고도 한다. 음식은 국수, 송편, 경단 등을 준비하는데 송편은 꼭 대접했다. 깨나 콩 등으로 만든 소를 넣은 송편에는 학문도 그렇게 꽉 채우라는 바람이 담겨 있다. ‘책을 씻는다’는 뜻을 가진 이러한 축하 행사는 외국에도 마찬가지다. ▼출판(出版)은 목판 인쇄로 책을 제작해 세상에 내놓는 것을 개판(開板)이라고 한 데서 유래했다. 중국에서는 오대(五代) 때 각인판(刻印板)·누판(鏤板), 송나라 때는 개판 각판(刻板)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목판의 재료로 가래나무 ‘재(梓)’를 이용한 데서 상재(上梓)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11세기부터 18세기까지 인시(印施), 각판(刻板), 인서(印書), 인출(印出), 간행 등의 단어를 썼다. 19세기에 출판(出板=出版)·발행(發行) 등의 말이 등장했다. ▼최근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봇물을 이뤘다. 특히 지난 9일 여의도는 국회 안팎에서 20여 건이 열리는 등 말 그대로 ‘출판기념회의 날’이었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총선 입지자는 이날(선거 90일 전)까지만 출판기념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러한 행사로 꽤 두둑한 후원금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선거법상 책을 공짜로 증정할 수는 없다. 돈을 받아야 한다. 책값은 대개 1만 원 안팎이지만, 의례상 축하의 의미로 책값 이상의 거금을 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출판기념회는 ‘그들만의 잔치’다. 이런 곳에 가보면 각계에서 내로라하는 유력 인사들이 다 모여 있다. 어느 실력자의 행사에는 1만여 명이 몰렸다는 후문도 들린다. 자기를 알리고 눈도장을 찍으려는 속셈이 뻔하다. 정작 책의 내용과 깊이는 뒷전이다. 출간은 자신의 학문과 지혜의 집적물을 대중에 처음 선보이고 평가해 달라는 뜻이다. 졸고(拙稿)라며 낮은 자세로 필명(筆名)을 얻는 기회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와는 상관없는 허명(虛名)을 좇는 자리가 돼 뒷맛이 개운치 않다. 조광래논설실장·krcho@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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