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걷이의 끝자락을 알리는 상강(霜降)이 지나자 산봉우리마다 단풍이 주단처럼 펼쳐지다 이제 낙엽이 쌓이고 있다. 절기와 시간은 고장나지 않는다는 말처럼, 세월의 흐름은 어김이 없다. 달포 전만 하더라도 역대급 무더위와 폭염이 기승을 부렸는데, 이젠 삭풍을 걱정해야 할 시간인 것 같다. 올해도 벽두를 시작해 11월까지 왔는데 누구나 힘겹고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떠오르는 글이 있어 공유해 본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삶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을 안고 딸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이젠 모든 삶을 포기하고 싶다고. 어머니는 깊은 생각 끝에 이런 딸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가, 냄비 세 개에 각각 물을 채웠다. 그러고는 첫 번째 냄비에는 당근을 넣고, 두 번째 냄비에는 달걀을 넣고, 세 번째 냄비에는 커피를 넣었다. 어머니는 냄비 세 개를 불 위에 얹고 끓을 때까지 조용하게 딸을 보며 앉아 있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불을 끄고 딸에게 먼저 당근을 만져보라고 했다. 당근을 만져보니 부드럽고 물렁했다. 그 다음엔 달걀 껍데기를 벗겨보라고 했다. 껍데기를 벗기자 달걀은 익어서 단단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딸에게 커피 향내를 맡고 그 맛을 보라고 했다. 딸은 웅숭깊은 커피향을 맡고 한 모금 마셨다. 어머니는 딸에게 설명했다. 이 세 가지는 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단다. 끓는 물이 바로 그 역경이지. 그렇지만 세 물질은 모두 다르게 반응했단다. 당근은 단단하고 강했지만, 끓는 물을 만난 후 부드러워지고 약해졌어. 달걀은 연약했지. 껍데기는 너무 얇아서 안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보호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끓는 물을 견디어내면서 그 안이 더욱 단단해졌구나.
그런데 커피는 특이했어. 커피는 끓는 물에 들어간 다음 물 전체를 변화시켜 버린 거야. 그리고 어머니는 딸에게 묻는다. 힘든 일이나 역경이 네 문을 두드릴 때 과연 너는 어떻게 반응하니? 당근이니, 달걀이니, 커피이니?” 위 내용은 우애령의 ‘희망의 선택’에 나오는데, 모두에게 해당되는 내용일 것 같다. 우리는 세파 속에 살면서 뭔가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부침과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을 받는 객체물이 바로 당근과 달걀과 커피이다.
꽃보다 아름다운 단풍 역시 그 변신 과정이 신비롭지만, 당근과 달걀과 커피 이야기와 흡사 닮아있다. 봄에 싹을 틔운 신록은 자라고 성장하여 녹음의 과정을 거쳐 빛깔 고운 단풍으로 우화한다. 그 과정에서 퇴색한 것도, 불볕더위에 꺾인 것도 있지만, 이 상황을 너끈히 넘은 나뭇잎만이 단풍이 된다. 그래서 단풍은 산홍(山紅)·수홍(水紅)·인홍(人紅)을 품고 있는가 보다. 형형색색의 단풍 저고리로 옷을 갈아입고 있는 백두대간의 봉우리를 보면서 신비감을 넘어 경외감까지 느끼게 된다. 그 과정이 너무나 처연하고 어렵기도 하지만, 자연에 순경(順境)하면서 결국 그 끝자락에는 아름다운 빛깔을 내고 고결하게 스스로 떨어져 낙엽으로 산화되기 때문이다.
11월 초순의 단풍은 앙증맞고 선홍빛을 띠어 애기단풍으로 불리는데, 대관령 옛길 단풍과 바우길 구간 단풍이 단연 으뜸이다. 청아한 계곡과 맞닿아 있는 대관령 옛길 단풍을 삼홍(三紅)이라 부르는데, 단풍이 울긋불긋 영험하게 불타는 산홍(山紅), 붉은 단풍이 심산계곡 물로 떠내려오는 수홍(水紅), 그 물빛과 산홍으로 등산객의 얼굴도 아스라이 물드는 인홍(人紅)이 그 세 가지이다. 단풍이 뿜어내는 붉은 빛과 산이 주는 안온함이 고즈넉함과 만나 산행에 나선 나그네의 심신을 편안하게 인도해 준다. 단풍 길을 만든 사람은 구도자이고, 그 길을 따라 걷는 사람은 순례자가 되는 절기다. 모두가 성찰하는 마음으로 단풍 길을 걸으며 사색의 분위기를 즐기는 11월의 순례자가 되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