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치악산 국립공원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는 산이지만 과거 조선 시대에는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산이었다. 왕실에서 사용할 황장목의 집산지로 함부로 산에 들어갔다간 엄벌에 처해져 곤혹을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치악산과 그 주변엔 최고 왕실의 숲임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았다. 구룡사, 학곡리, 비로봉 황장금표(黃?禁標)와 지금은 영월군 행정구역에 포함된 두산리, 법흥사 황장금표까지 포함하면 5개의 금표가 설치된 황장목의 집산지였다.
치악산 구룡사는 원주의 대표적 사찰이다. 구룡사는 668년(문무왕 8년) 의상(義湘)이 창건했으며, 사찰 창건에 얽힌 아홉 용 설화가 있어 이름 지어졌다. 창건 이후 도선(道詵)·무학(無學)·휴정(休靜) 등의 고승이 머물면서 영서지방 수찰(首刹)의 지위를 지켜왔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사세가 기울어지자 어떤 노인이 나타나 이르기를 “절 입구의 거북바위 때문에 절의 기가 쇠약해졌으니 그 혈을 끊으라”고 했다. 거북바위 등에 구멍을 뚫어 혈을 끊었지만 계속 사세는 쇠퇴하였고, 거북바위의 혈을 다시 잇는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구룡사로 불러 그대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에 세운 황장금표는 치악산 일대의 송림에 대한 벌채를 금하는 방으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금표는 황장목 봉산(널빤지로 사용하는 품질 좋은 큰 소나무가 있는 국가지정보호 국유림)의 경계표지로서 황장목 금양(궁중용재 보호)을 위해 일반인의 도벌을 금지하는 경고표시로 설치된 것이다. 보통 자연석에 새겨 표시하는데 이 표식을 중심으로 그 일대가 황장목 보호구역임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전쟁 이후 조선의 산하는 헐벗어 소나무 벌채를 금지하기 위해 금표를 설치, 왕실에서 사용할 산림자원을 적극 확보했고, 황장목 관리에 특별한 애정을 쏟았다. 치악산은 특히 우수한 소나무가 많아 사랑을 받아 왔다. 또한 강원감영이 있어 소나무를 송출하기 위한 인력과 행정력을 쉽게 동원할 수 있는 큰 이점을 갖고 있었다. 뗏목을 통해 섬강과 남한강을 이용하면 서울에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치악산은 조선 초기에 전국 60개소 황장목이 있는 봉산 가운데서도 가장 이름난 곳 중의 하나였다.
첫 번째 학곡리(새재) 황장 외금표는 구룡사에 도착하기 100m 전 원주 소초면 학곡리 야영장을 지나자 마자 오른쪽 길 안쪽 새재마을 입구에 위치해 있다. 금표는 1993년에 발견됐다. 황장 외금표라는 글자가 자연석에 각자돼 있다. 세로로 씌여 있으며 두 줄로 黃腸(황장)과 外禁標(외금표) 각각 한 줄씩 차지하고 있다. 바위가 일부 땅속에 묻혀 표석의 크기를 가늠하기 어렵다. 이 외금표는 구룡사 입구의 황장금표와 관련 있어 보인다. 두 황장금표는 글씨체가 다른 것으로 보아 서로 다른 시기에 씌였다. 금표의 위치로 볼 때 구룡사 입구 금표는 새재마을에 있는 금표의 동쪽에 있다. 이러한 상관성을 보면 새재마을에 외금표를 세운 것은 광고의 효과를 위해 행인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설치됐다.
두 번째 구룡사 황장금표는 강원도기념물 제 30호다. 금표의 위치는 구룡사 매표소 건너편에 있다. 산림문화유산의 가치를 알리는 안내판도 설치돼 있다. 최근 원주시와 치악산국립공원은 황장목 걷기행사를 통해 시민들에게 소나무의 가치와 중요성을 홍보하고 있다. 치악산 소나무가 갖고 있던 과거의 영광을 오늘로 잇는 행사다.
마지막 비로봉 황장금표는 치악산 정상 비로봉 9부 능선에 황장금표가 있다. 세렴폭포 탐방센터에는 똑같은 크기의 모형 금표가 설치돼 있어 여러 이유로 정상을 밟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리 만족시켜준다. 황장금표는 황장목 (왕실에 진상하던 색이 누렇고 질이 좋은 소나무)의 벌채를 금지한다는 경고문이며 18세기 전후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에 추가로 발견된 이곳 비로봉 황장금표로 인해 3개의 금표가 있는 치악산은 전국 유일의 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