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민족의 영산 태백산에 오르다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태백산에서 제사를 지낸 전통은 삼국시대까지 소급한다. 문헌상으로 확인 가능한 것이 그렇지 훨씬 이전부터 제사를 지내왔을 가능성이 크다. 밑도 끝도 없이 138년에 일성이사금이 제사를 지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와 '세종실록지리지'는 신라에서 오악(신라 때에 이름난 다섯 산)에 중사(국가적인 규모의 제사로 대사 다음가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알려준다. 태백산은 북악에 속했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서 제사의 성격이 변한다. 지방 관청이 관리하거나, 민간 차원에서 종교 의례가 베풀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렇게 기록한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이라 한다. 산 곁의 강원도 및 경상도 고을 사람이 봄가을에 제사하는데, 신위를 모신 곳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삼척과 봉화 주민들이 꾸준히 제사를 지냈음을 보여준다.

이후 태백산은 구국의 영산으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의병과 동학을 비롯한 신흥종교 신자들이 산을 찾았다. 신성함이 깃든 태백산은 하늘을 관장하는 최고의 신령이 있다고 믿었다.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민족 전체를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여겼다. 이인상(1710~1760)의 눈에 비친 모습이 궁금하다. 그는 한겨울에 태백산을 오르고 '유태백산기'를 남겼다. 봉화 각화사에서 출발하여 태백산 정상까지 등반한 기록은 매서운 겨울 한복판으로 끌고 간다. 태백산 세찬 바람 속을 걷는다고 착각할 정도다.

해가 지고 달이 나오니 산꼭대기의 나무만 보일 따름이다. 울퉁불퉁해서 기기하고 고고하며 너울너울하면서 아래옷을 잡아끌고 소매를 찢는다. 억셈이 쇠와 같아서 몸을 구부려 가게 만든다. 뿌리를 꼭꼭 싸맨 듯 뒤덮은 눈은 사람의 무릎까지 빠지게 만들고 바람이 불면 휘날린다. 북방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하늘을 어둡게 만들고 땅을 찢어서 우르릉 우레 소리를 내고 뒤흔들기를 바다처럼 한다. 거대한 나무는 울부짖어 분노하고 작은 나무는 슬피 운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구덩이에서 산행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후회할 틈이 없을 정도로 상황은 급박하다. 땅을 찢을 듯한 바람 소리는 우레 같다. 제법 굵은 나무는 분노하는 듯 울부짖는다. 손가락 같은 작은 나무는 슬피 우는 듯하다. 온 천지가 바람 소리로 가득하다. 다음날 주막을 나섰을 때도 마찬가지다. 바람은 맹렬하여 들판의 쌓인 눈이 모두 일어나 구름과 안개로 뒤엉켜 천지사방이 아득하다. 걸음이 한 자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말이 통하지 않을 정도이다. 고생 끝에 오른 태백산은 그에게 공포와 경외감을 느끼게 했을지 모른다. 아니 장엄함을 생각했을까.

그는 태백산에 대하여 말한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되었으므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백 리에 달하므로 공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대인이 내면의 덕을 지닌 것 같다.” 장군봉과 부쇠봉, 문수봉을 아우른 태백산에서 그가 본 것은 평탄하게 보이는 곡선의 미학이었다. 혹독한 겨울 산에서 이인상은 후덕한 대인의 풍모를 보았다. 송병선(1836~1905)도 “단정하고 두터우며 중후한 것이 덕이 있는 사람의 기상이어서 지리산과 우열을 논할 수 있다”라고 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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