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월요칼럼] 김홍도의 길 따라 여행하기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산을 유람한 글(유산기)을 들고 설악산 이곳저곳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외설악에서 김홍도의 그림을 만났다. 조선의 화가라면 명산을 화폭에 담고 싶었을 것이다. 유산기를 들고 오대산을 오르니 여기에도 여러 작품을 남긴 것이 아닌가. 문수성지로 유명한 오대산을 그리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왕조실록을 보관한 오대산사고가 있으니 필수 코스였을 것이다. 이때부터 김홍도의 그림을 모으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익살과 해학, 풍자를 섞어 향토적인 정취로 그린 조선 후기의 화가는 누구일까. 〈무동〉, 〈씨름〉, 〈서당〉 등의 풍속화를 그린 화가라고 설명을 하면 김홍도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 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 신선, 불화,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뛰어난 작품이어서 옛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스승이 이렇게 평가한 화가도 김홍도이다. 풍속뿐만 아니라 조선의 산수도 그의 붓 아래서 조선풍으로 탄생했다.

김홍도는 혼자 그림 여행을 다닌 것이 아니었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1788년 가을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과 관동팔경 지역으로 그림 여행을 떠나게 된다. 강세황은 「찰방 김홍도와 김응환을 전송하며」에서 사건의 전말을 증언해 준다. “김홍도와 김응환은 그림을 잘 그려서 한 시대에 이름을 독차지하였다. 1788년 가을 특별히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영동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천을 그림으로 그렸다.”

김홍도의 그림은 『금강사군첩』에 60점이 전하며, 김응환은 『해악전도첩』에 60폭을 담았다. 이후에 김홍도 화풍이 직업 화가들에게 승경을 그리는 효과적인 표현으로 인식되면서 19세기 전반에 김홍도 화풍을 임모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작가 미상의 『금강산도권』은 금강산 주변의 승경과 관동지방의 명소를 모두 망라했다. 영월 주천에 이르러 청허루를 그리고, 이어 평창 청심대를 묘사했다.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월정사, 오대산사고, 상원사, 중대 적멸보궁을 화첩에 첨가하고 다시 큰길로 나와 횡계를 거쳐 대관령을 넘었다. 대관령 정상에서 내려오다 강릉을 조감하며 화폭에 담았다. 강릉에서는 천연정, 구산서원, 경포대, 호해정 등에서 붓을 들었다. 삼척으로 내려가니 죽서루와 능파대, 무릉계와 용추폭포가 절경이었다. 울진의 성류굴,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사생했는데 이곳이 남쪽 끝이다. 북상하여 강릉을 지나 양양으로 갔다. 낙산사, 관음굴을 묘사하고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토왕폭, 계조굴(울산바위), 와선대, 비선대가 인상적이었다. 속초를 지나 고성의 청간정과 선유담을, 더 북상하여 감호와 영랑호를 스케치했다. 북한 고성에서는 해금강과 삼일포를 본떴다. 이어 통천에서 총석정을, 흡곡에 이르러 시중대에서 구도를 잡았다. 내・외금강을 집중적으로 사경한 후 한양으로 향했다.

강원도 일대와 금강산을 그리기 위하여 다닌 곳을 김홍도의 길이라 불러도 될 것이다. 김홍도의 길을 여행하는 것은 색다른 문화예술 체험이다. 창작의 현장에 직접 가보고 그림과 실경을 대조하는 것은 고상한 여행이다. 김홍도의 무동이 된 듯 절로 춤사위가 나온다. 금강산의 명소는 와유가 제격이다. 와유는 방안에 누운 채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산수를 감상하거나 산수의 기운을 누리며 즐기는 행위다. 차선책이지만 그림을 방에 걸고 누워 유람을 즐기는 것은 우아한 일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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