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총선
총선
총선

기고

[확대경]인정받으려는 욕망의 노예

유상민 평창 재향경우회장

인간의 욕망은 활화산이다. 마르지 않은 샘처럼 끝도 없이 솟구친다. 좋은 일에 쓰일 욕구야 얼마든지 권장하고 성장시켜야 하지만 문제는 개인 또는 집단의 사리사욕이 도를 지나치고 있다는 점이다. 탐욕을 버리라는 종교적 가르침은 이미 헛구호가 되었단 말인가. 사회가 혼탁해지고, 사람의 심상이 점점 픽 팍해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욕망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주변에서 발생하는 모든 범죄나 사건. 사고 역시 지나친 욕구가 그 시발점이요 잔재일 수밖에 없다.

베이비 세대가 은퇴하여 노인 세대로 넘어가고 있는 시대다.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 온갖 고생 끝에 이루어낸 이들의 삶의 과정은 눈물겹도록 다이내믹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성공 신화를 이룬 인물. 공직에 몸을 담아 주요 직책에서 봉사했던 사람이나 자영업에 종사했던 사람 역시 그 방면에서 CEO의 위치까지 올라갔던, 그러니까 누구든지 열심히 잘 살은 사람은 어느 곳이든 성공 신화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이 들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살아온 과정을 보면 최선을 다한 삶이었을 것이다. 출세하여 잘살아 보겠다고 하는 욕망의 그물을 저변에 깔아놓고 치열한 삶을 살았지 싶다. 그러나 윤회의 강은 어김없이 흘러가고 시곗바늘은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은퇴 후 찾아오는 소외감이나 외로움은 늙음을 대변해주고 이 또한 알아주는 이 없으니 욕망에 올가미가 쓰인 까닭 아니던가. 왜 잘난 나를 몰라주느냐고 아무리 왜 쳐 봐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허망뿐이다. 대게의 지각 있는 사람은 솟구쳐 오르는 욕망의 머리를 짓누르며 자존감을 잘도 이겨내고 있다.

그러나 일부 억센 욕망의 소유자는 자기를 존중하는 자부심이 강했는지 왜 잘난 나를 몰라주느냐고 항변한다. 내가 누구인데 감히 하면서 세상과 맛 서고 있는 것이다. 인정받기 위한 욕구 앞에 도덕이나 체면 따위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는 말인가. 누구든 충고하고 경고하면 시빗거리가 된다. 내려놓아야 세상이 편한데도 그들의 마음속 한쪽에는 분명 병든 빙의가 자리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떨어지질 않는다. 인정 욕망의 틀에 가두어진 노예들이다.

법정 스님은 성욕이나, 명예욕은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극복하기 참으로 어려운 욕구가 있었는데 그것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했다. 100세를 넘게 사는 김형석 교수도 용돈을 받은 손주가 고마워할 때 인정받았다는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았다고 회고했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나이와 상관이 없는 듯하다.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溫 不亦君子乎) 논어의 글귀를 굳이 인용할 필요도 없다. 컵 속의 공은 물이 차면 자연스레 위로 떠 오르듯, 다 때가 되면 세상도 각자의 내공에 걸맞게 평가해 주기 마련이라는 얘기다. 다스릴 수 없는 인정 욕망이야말로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파괴하는 암 덩어리와 다름없다. 내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설악의 단풍과도 같은 소박한 욕망으로 바뀌어 봄은 어떨지 자문해 본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피플 & 피플

이코노미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