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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중언]‘화폐의 가치’

10여년 전만 해도 출판가에서는 ‘10억원 벌기’를 주제로 한 책이 넘쳐났다. 주식으로, 부동산으로, 창업으로 큰돈을 만들어 보려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때는 10억원이면 이른바 ‘경제적 자유’를 누리고 노후 대비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하지만 요즘 화폐 가치를 감안하면 10억원으로는 어렵다. 이미 수도권의 아파트 값 한 채 평균값이 10억원을 넘어섰다. ▼‘화폐의 가치’는 물가에 따라 변화한다. 따라서 전반적인 물가변화지표인 소비자물가지수를 이용해 화폐 가치 변동을 추정할 수 있다. 집값도 그중 하나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시중에 한창 돈이 풀렸던 2020~2021년 수도권 아파트 값은 자고 나면 수천만원씩 뛸 정도였다. 또 의왕·시흥·오산·송도 등 경기·인천에서도 50% 가까이 급등했다. 이를 두고 “집값이 오른 게 아니라 돈 가치가 떨어진 것”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최근 달러 강세에 한국·일본·중국·유럽 등에서 통화 가치가 연일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3년여 만에 처음으로 1,400원대를 넘었다. 엔·달러 환율은 1998년 이후 24년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위안·달러 역시 심리적 지지선인 포치(破七·달러당 7위안대)가 붕괴되면서 불안감이 높아지고 있다. 역사상 최초의 달러·파운드 패리티(1달러=1파운드) 진입 우려도 확대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공격적인 금리 인상이 촉발한 결과다. 미국을 제외한 각국에서 고통이 커지고 있다.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수출한다는 비판과 연준의 책임론이 확산되고 있다. ▼인플레이션이 쓰나미처럼 경제를 휩쓰는 ‘화폐의 보복’을 인류는 수없이 경험했다. 화폐는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는 교환수단이지만 화폐 역시 상품이다. 많이 유통되면 가치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시중에 돈이 넘쳐나면 언젠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한 사회의 기초를 무너뜨리는 수단 가운데 화폐의 타락만큼 교묘하고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금언을 다시 되새기게 하는 요즘이다.

박종홍논설위원·pjh@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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