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정일주의 지면갤러리]춘천을 호흡한 조각가, 시간을 주물러 영원을 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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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권진규

어쩌면 그 조각의 뒷심은 ‘강원도’가 아닐까?

한국 근현대미술의 창공에 빛나는 1세대 조각가 권진규(權鎭圭, 1922~1973)는 꿈많은 청소년기를 강원도의 공기를 호흡하며 보냈다. 춘천공립중학교(현 춘천중, 고등학교)에서, 1943년부터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배우기 전, 대부분의 교육을 춘천에서 받았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성공한 사업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권진규는 함흥에서 춘천으로 옮겨 학교에 진학했다.

◇권진규 作 자소상(1967).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강원도의 힘’과 탄생 100주년

올해는 권진규 탄생 100주년이다. 이를 기념하며 대대적인 전시회가 열렸다. 석조를 비롯해 점토를 구워 빚은 테라코타, 삼베에 옻칠하는 건칠 방식으로 완성한 환조 및 부조 작품이 선보였다. 고고한 조소 작품들은 인간의 근원에서 출발하여 초월로 치닫는 정신적 치열함으로 관람객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권진규는 도쿄예술원에 들어가 미술교육을 받았고, 1949년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조각을 배웠다. 당시 그곳에는 부르델(E.A. Bourdelle)의 제자인 시미즈 다카시(Shimizu Takashi) 교수가 조각을 가르치고 있었다. 다카시의 가르침 아래 학창시절 내내 사실주의적 표현을 따르면서도 표현주의적 미감을 접목한 그는 1959년 귀국한 뒤 흙을 이용한 테라코타 작업과 건칠에 집중했다. 그러면서도 단순한 형태감과 거친 표면의 체형으로 원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이는 강원도 출신인 박수근의 작품 스타일과 '가족 유사성'을 띤다.

◇권진규 作 자소상(1968).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지원의 얼굴'과 ‘자소상’ 속의 예술혼

사실에 바탕한 소녀와 연극배우, 학생 등의 인물과 동물은 물론 추상작품까지 소화하며 다양한 대상을 주제로 환조, 부조, 드로잉을 넘나들었다. 하지만 그는 색을 사용하지 않고, 재료 본연의 느낌을 살렸다. 불필요한 장식을 없애고, 명상과 정신적 구도 자세를 집약적으로 표출하였다. 형태를 빚는 과정에 투영된 손맛이 재료의 신비감에 더 표현적 분위기를 실었다.

1967년에 제작한 '지원의 얼굴'은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여인의 얼굴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일단 그는 머리와 목 아랫부분을 단순하게 처리하고 형체를 길게 늘였다. 이로써 관람객의 시선이 얼굴에 집중되는 효과가 났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다른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고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는 눈과 정면을 향한 부동자세, 긴 목과 수도승을 연상시키는 머리가 긴장감과 엄숙한 분위기를 고조한다. 이는 동/서양의 조각 전통에서 영감을 받아 독자적 조형세계로 창작한 것이었다. 권진규는 근대조각가들이 쫓았던 사실주의적 묘사와 기술에 치중한 구상작품과 달리, 자신의 심리적 탐색 과정을 그대로 형상화했다.

◇권진규 作 자소상(1969-70).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 조각의 상표가 된 ‘자소상(自塑像)’이 대표적이다. 그는 모델과 작가와의 관계를 ‘모델+작가=작품’이라 설명한다. 모델의 내적 세계를 작품에 담고자 했다. 따라서 자신이 모델을 잘 아는 만큼 작품을 더 잘 만들 수 있다고 믿었다. 1960~70년경 제작한 비구상에, 자신의 얼굴을 중첩해 표현한 것은 그가 작업을 통해 무언가를 갈구하는 구도적인 차원에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흉상 외에 제작한 마스크에서도 확인된다. 데드마스크 형식을 취하고 있는 두상은 삶과 내세의 중간지점에서 인간의 영혼을 불러낸다.

그가 자화상을 많이 드로잉한 점, 1965년 첫 개인전 포스터에 자소상을 전면으로 내세운 점, 이력서에 대표작품으로 자소상을 꼽은 점 등을 볼 때, 자소상은 예술로 압축 조형한 권진규였다.

◇권진규 作'지원의-얼굴'(1967)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엄숙한 작품세계에 핀 ‘말’의 해학성

그런가 하면 개, 말, 새, 소, 고양이 등을 구상, 추상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만들었다. 특히 말은 중요한 모티프였다. 말을 주제로 한 작품이 수묵드로잉에서부터 환조, 부조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는 점은 그가 말이라는 대상을 깊이 천착했음을 증명한다. 그중에서도 1965년에 제작한 '기수(말과 남자)'는 해학적인 표현까지 가미되어, 권진규 작품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 준다. 사각의 프레임 안에서 남자와 말이 서로 다정하게 교감 중이다. 말은 짧게 잘린 꼬리를 바짝 쳐들었다. 엉덩이의 은밀한 부위가 당당하게 드러나 있다. 남우세스러운 광경이지만 권진규의 천진함과 해학성이 은근슬쩍 빛난다.

그는 생전 단 세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65년 서울 신문회관에서 개최한 첫 개인전, 무사시노 미술학교에서 교수직을 제의할 정도로 성공적이었던 일본 니혼바시 화랑에서 가진 두 번째 개인전, 명동화랑의 1주년 기념초대전이 그것이다. 그리고 1973년 5월에 개관한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전시가 있다. 이곳은 그의 마지막 외출 장소가 되었다. 그는 개관식 다음 날 전시장에 들러 자신의 작품을 둘러보고는 동선동 작업실로 돌아가 쇠줄에 목을 맸다. 그때 나이 51세였다.

◇권진규-作-'손'(1963)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권진규-作-'곡마단'(1966)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비운의 조각가’에서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으로

세상은 그의 죽음을 이례적으로 생을 마감한 천재다운 것으로 보도했다. 자살은 그에게 ‘비운의 조각가’란 수식과 작품에 신비한 아우라를 부여했다. 1950~60년대에 유행한 추상조각과 다른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작업을 했던 권진규는 재료에서도 테라코타, 건칠 등을 다룸으로써 동시대의 작가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그의 명성은 돌올한 작품세계보다 죽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게 현실이다. 한결같이 ‘이상(理想)’과 ‘영원(永遠)’의 추구를 지향했던 그에게 극적인 죽음이 어떤 의미였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이제는 구도자적 자세로 치열하게 작업했던 ‘조각가 권진규’의 작품에 집중할 때이다. 혹, 그 표현에서 강원도의 유전자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정일주 월간 퍼블릭아트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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