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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군인·경찰·학생·시민 한마음으로 방어 ‘대한민국을 지켜낸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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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의 조형물

‘치열하게 대전차포를 쏘는 군인들, 그 뒤에서 손으로 포탄을 들어 올리는 학도병, 지게에 포탄을 실어 나르는 시민....’

춘천시 근화동 소양2교 부근 ‘춘천대첩 기념 평화공원’에 있는 한 조형물의 모습이다. 이는 낙동강 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전쟁의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춘천대첩’의 의미를 한눈에 보여준다.

춘천지구 전투는 1950년 6월25일부터 6월27일까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 제19연대가 북한군 제2군단 소속의 제2사단에 맞서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 국군뿐만 아니라 경찰, 학생, 제사(製絲)공장의 여공을 비롯한 수많은 시민이 북한의 기습 공격에 함께 나선 전투였다. 이로써 병력 열세를 딛고 ‘24시간 내로 춘천을 점령해 수원 방면으로 기동, 국군을 포위한다’는 북한의 목표를 좌절시킨 전투이기도 하다.

■전쟁의 징후, 새벽 기습 공격=1950년 6월19일 오후 3시. 춘천 방면을 방어하는 제7연대에 투항한 북한군 1명이 북한의 공격 개시 정보를 털어놓았다.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6월23일 야간 작전 회의를 소집하고 비상경계태세에 돌입하며,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에게 외출·외박 통제를 건의했다. 김 대령은 이를 허가했다.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포병 공격 준비사격이 시작됐다. 화천에서 춘천에 이르는 관문인 ‘모진교’ 남쪽에 배치된 국군 9중대가 큰 피해를 입었다. 중대장, 소대장이 전사하며 지휘체계가 무너졌고 북한군은 모진교를 점령했다. 당시 북한의 전투력은 국군보다 병력 면에서 4배, 화력 면에서 10배 우세했다.

양구에서 춘천으로 가기 위해 거쳐야 했던 북산면의 ‘내평리’도 위기였다. 제7중대가 철수하고 있을 때 춘천경찰서 내평지서는 국군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북한군에 포위됐다. 내평지서장 노종해 경위와 경찰관 12명, 대한청년단원들은 내평지서 주변에 모래주머니를 쌓아 진지를 구축하고 1시간 이상 맞섰다. 치열한 교전 끝에 노종해 경위 등 11명이 전사했다. 경찰들이 격전을 치르는 동안 국군 제2대대는 소양강 남쪽에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경찰청은 내평지서 전투 전사자를 포함, 6·25전쟁 전사자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0년 강원경찰충혼탑을 세웠다. 해마다 강원경찰청장들은 부임 후 춘천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이곳에 들러 추모하고, 임기를 시작한다.

■포탄을 나른 시민들 ... 첫날 방어 성공=남침 공격 첫날 소양강을 건너 춘천을 점령하려던 북한군의 계획은 실패했

다. 여기에는 화천에서 춘천으로 내려오는 길목에서 벌인 ‘옥산포 전투’가 있었다. 국군 제7연대의 경계 진지를 돌파한 북한군 제6연대는 SU-76자주포를 앞세워 내려왔다. 정오에 북한군의 주력이 넓은 보리밭에 나타나자 제7연대 제1대대는 사격을 개시했다. 병력 손실을 입고 퇴각한 북한군은 오후 2시께 자주포 10대를 앞세워 다시 옥산포로 공격해 왔다.

이를 기다리고 있던 제2소대는 57㎜ 대전차포로 북한의 자주포를 타격했다. 곧바로 특공조가 휘발유병과 수류탄으로 적 자주포 3대를 파괴했고, 자주포에서 뛰어내려 도주하려던 북한 승무원을 생포했다. 북한 제2군단장 김광협은 옥산포에서 패배했다는 보고를 받고 “안색이 흙색이 됐다”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국군이 각종 실탄을 확보하는 데에는 춘천 시민들의 힘이 컸다. 제16포병대대는 소양강 북쪽의 대대탄약보급소에 있던 탄약을 소양강 건너편 남쪽으로 옮겨 포탄 5,000발 등을 확보했다.

제16포병대대의 탄약 운반을 지원했던 김유환씨는 “춘천농업학교, 춘천사범학교 학생, 시민, 잠사회 여공, 경찰들이 이러쿵저러쿵 반대 없이 한마음으로 옮겼다”고 했다. 제16포병대장 김성 소령은 “시민들의 도움으로 탄약을 대부분 운반할 수 있어 탄약 부족은 걱정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소양강 방어선 전투=첫날 전투에서 패배한 북한군은 제2사단장을 교체하는 강수를 뒀다. 해임된 이청송의 후임으로 부임한 북한 제2사단장 최현은 26일에는 춘천을 점령하려고 했다.

국군 제7연대가 전쟁 첫날 춘천을 지켜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제19연대가 증원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제19연대 2대대는 우두산 일대의 방어 진지를 점령하고 제7연대 1대대를 지원할 태세를 갖췄다.

26일 새벽 3시께 북한의 공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SU-76 자주포를 소양강 북쪽에 두고 봉의산(강원도청 뒷산) 연대 관측소는 물론이고 소양강 제방 진지에 직격탄을 퍼부었다.북한의 총공격에 대전차포 소대원들이 두려운 마음에 진지를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소대장 심일 중위는 진지로 뛰어들어 직접 대전차포 사수가 되어 사격을 개시했다. 대전차포 소대는 북한군의 춘천시내 진입을 막았다.

북한군은 소양교 돌파가 실패하자 가래묵나루로 소양강 도하를 시도했지만 국군의 포격을 받았다. 북한군은 엄폐물이 없는 강변의 모래사장에서 일방적으로 포격을 맞으며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제6사단은 이틀에 걸쳐 춘천을 사수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은 악화되고 있었다.

■작전상 후퇴와 춘천 함락=북한군은 27일 오전 5시부터 소양강변과 봉의산 일대에 포격을 시작했다. 제6사단장 김종오 대령은 춘천의 행정기관, 시민이 탈출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27일 정오 무렵, 국군 제7연대의 방어도 한계에 다다랐다. 북한군은 자주포를 앞세워 이날 오후 1시께 소양로1가에서부터 4가까지 점령하며 사실상 춘천의 중심부를 모두 점령했다. 오후 6시께 춘천의 최종 방어선이 돌파됐고 임부택 중령은 철수를 명령했다. 북한군이 시가지에 진입하자 시민들도 피란을 가기 시작했다. 춘천지구 전투에서 국군 제6사단은 370명이 전사했고, 북한군의 사망자는 6,800명이었다.

이렇게 북한군 제2군단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개전 초반 국군이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편 28일부터 북한군 시체를 소양강에서 건져내는 작업이 진행됐다. 꼬박 3일이 걸렸다. 이 작업을 했던 노병 김장현씨는 훗날 춘천지구 전투 연구진과의 인터뷰에서 “그 이후 해마다 6월26일과 8월 추석이 되면 소양강에 가서 술을 한잔 부어 놓고 영혼이라도 편히 잘 살라고 기원했다”고 말했다. 자신과는 개인적으로는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인데 죽였다는 무거운 마음 때문이었다. 당시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도 없었다.

전쟁을 기록하고 기억해야 하는 건 이런 비극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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